책 속에서
p77.
유대인 감독 밑에서 유대인 유적지를 열심히 파헤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지친 모습은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동안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일에 지친 가난한 목수 노동자 예수가 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노동자가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나는 노동자 예수를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내가 가장 보람차게 느낀 것이 그 노동자 예수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p100.
예수가 혁명하여 자유를 갖도록 이끌어야 할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인이지만, 예수 생존 시와 달리 이제는 착취자인 유대인도 인간 혁명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역시 혁명가 예수를 필요로 합니다. 아니, 팔레스타인 문제를 낳고 지금까지도 모른 체하는 영미 등의 소위 선진국을 포함한 인류 전체가 혁명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아나키스트 예수는 앞으로 올 사람이지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p133.
바벨탑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는 중앙집권의 상징입니다. 신이 중앙집권을 막기 위해 언어를 분화하고 흩어지게 함은 분권화가 신의 의지임을 보여줍니다. 신이 원하는 세계는 권력의 집중이 아니라 권력의 분산입니다. 하나의 말만 요구되는 획일적인 세계가 아니라 창조 세계 안에서 각기 다른 말과 문화를 가지고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 것은 권력의 분산으로 가능해집니다.
p135.
권위주의적인 종교개혁에서 16세기의 급진적 종교개혁운동인 재세례파(Anabaptism가 그랬던 것처럼 아나키즘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보다는 부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 혁명 운동입니다. 재세례파가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모두에게 멸시를 받았던 것처럼, 아나키즘은 근대에 정치적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똑같이 무시당했습니다. 자끄 엘륄이 주장하듯이 아나키즘이 특히 기독교인, 그리고 더욱 특히 현대 재세례파에 의해 재고되어야 합니다.
p143.
기독교 아나키스트들에게 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