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머리 ‘이야기 부산대첩’을 쓰는 이유 4
임진년 난중일기 - 부산포를 향해 출전 8
1부 결심
한산대첩 후의 고민 14
정운을 부르다 20
조방장 정걸 24
2부 준비
전라좌·우수군을 한곳에 모으고 32
훈련의 현장 36
마지막 점검 40
3부 출전
출전의 행렬 46
당포에서 경상수군과 만나다 50
대전을 앞둔 날의 흉몽과 길몽 54
마지막 작전회의 60
4부 대첩
결전의 날 68
왜군의 전략들 72
왜군 본진을 향한 진군 76
부산포의 대승첩 78
바다를 얻고 정운을 잃다 84
5부 평가
부산승첩보다 큰 승첩은 없었습니다 88
사라진 승첩 포상 92
소박한 자축연 96
정운 장군에 대한 애도 100
에필로그 훗날의 이야기 104
이순신 장군 스스로 ‘가장 큰 공’이라 평가한 싸움, ’부산대첩’
“부산대첩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도 없었을 것!”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이순신 함대는 옥포·당포·한산·부산의 왜적을 휩쓴 네 차례 승첩에서 10번 접전을 펼쳐 모두 크게 이겼다. 옥포승첩의 3회 접전(옥포·합포·적진포에서는 적함 42척을 깼다. 아군 피해는 부상 1명. 당포승첩의 4회 접전(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는 거북선이 사천해전에 처음으로 참여했으며 적함 72척을 깨고 이순신이 부상을 입었다. 한산대첩에서는 적선 79척을 깼다. 죽은 왜적 수는 9,000여 명. 왜군 장수도 수십 명 죽고 마나베 사바노조는 할복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 피해는 한산과 안골포 해전을 합쳐도 전사 19명, 전상 115명뿐이었다. 부산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전선 470여 척 가운데 100여 척(이순신 장군의 장계을 격파하는 최대 전과를 올렸다. 아군 피해는 이순신 장군이 가장 아끼는 정운 장군을 비롯하여 전사 6명, 전상 25명. 그래서 이순신 장군 스스로도 장계에서 “힘써 싸운 공로는 먼저보다 훨씬 더합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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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전후 네 차례 출전하여 열 번 접전을 하고 모두 승첩을 이뤘으나, 만약 장수와 군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의 부산전투를 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전번에 싸울 때에는 적선의 수가 불과 70여 척이었습니다만 이번은 큰 적의 소굴에 늘어서서 정박하고 있는 400여 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떨치고 승기를 타고 돌진하였습니다.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꺾이지 않고 하루 종일 분한 마음으로 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깨뜨려 부수고, 적들로 하여금 마음이 꺾여 가슴이 무너지고 머리를 움츠리고 두려워서 떨게 하였는바, 비록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으나 힘써 싸운 공로는 먼저보다 훨씬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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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9월 당시 부산포는 완전한 적의 본거지였다. 적선은 거의 500척, 병력은 6~7만 명. 판옥선 74척(협선 등을 합쳐 166척인 이순신 함대가 밀고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