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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일제침략기 의병장 73인의 기록 (전5권
저자 이태룡
출판사 광문각
출판일 2022-08-15
정가 90,000원
ISBN 978897093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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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경인지역」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강기동
 헌병보조원 출신 의병장
 서울 태생의 기병대 참교 출신
 헌병보조원의 연원과 인원수
 헌병보조원 중, 의병 참여자
 이은찬 의진에 참여하다
 창의원수부 중군장이 되어
 돌압산 전투에서 승전하였으나
 경술국치 이후까지 독자 의진 이끌다
 원산에서 피체, 용산에서 총살, 순국

13도의병 총도독(總都督 김수민 의병장
 김수민 의병장은 어떤 분이었나?
 대ㆍ소포로 무장하여 의병투쟁에 나서다
 13도창의대진 총대장 이인영 직할대와 합진
 13도창의대진 활동 이후의 의병투쟁
 과감한 서울 잠입과 서울진공작전 모색
 공훈록의 오류, 바로잡아야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김연성
 성균관 박사로 벼슬길에 나아가다
 권중설 의진에 참여하다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다
 서울진공작전 전개 후 임진강 유역으로
 허위 의병장 도와 2차 서울진공작전 꾀하다
 창의군수부 참모장으로 활약하다
 김연성 의병장은 교수형으로 순국했나

일본 군함ㆍ수뢰정과 맞선 김용기 의병장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 의병투쟁 기록
 배를 이용한 의병장 실체 드러나다
 일제, 러일전쟁 때의 군함과 수뢰정 동원하다
 피체와 순국

남한산성 점령했던 김하락 의병장
 갑오왜란 일어나다
 갑오왜란에 반발, 의병 일어나다
 을미왜란으로 전국에서 거의하다
 김하락, 대규모 의병 일으키다
 남한산성 점령하다
 의병 해산령 내리다
 남한산성 내주고 영남으로 향하다
 경북지역의 의병 상황
 경북지역 여러 의진과 함께하다
 이천의진의 최후와 김하락의 순국

강화분견대 병정 출신 의병장 박계석
 의병장이 된 강화분견대 병정
 의병투쟁과 고분 도굴범ㆍ밀정 처단
 강화도의병 진압과 공훈록 유감

강화도까지 진출한 평산의병장 심노술
 박정빈 의진에서 의병활동 시작
 강춘삼ㆍ이근수 의진 등과 연계하다
 일제의 귀순 공작, 논리적으로 반박하다
 강화도 지역까지 진출하다
 13도창의대진 서울
1903년 10월부터 일제는 그 앞잡이들을 내세워 비밀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인적ㆍ물적 자원을 제공하도록 획책하였는데, 광무황제는 이를 재가하지 않고, 비밀리 이용익(李容翊 일행을 청국 지푸로 보내어 ‘만약 러일전쟁이 일어난다면 엄정중립을 지키겠다’라고 선언하였다. 일제는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고, 다른 사람들은 감금한 후 황제의 재가가 필요한 ‘조약’ 대신, ‘의논(議論해서 정(定한 문서(文書’라는 의미의 ‘의정서(議定書’를 만들어 일본공사와 일제로부터 비밀리 거액의 뇌물(1만원, 당시 쌀 1만석 가격을 받은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지용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에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경술국치 전후까지 7년 동안 줄기차게 일본 군경을 상대로 싸웠던 의병이 후기의병이었다.

일제는 의병진압을 위해 군사령부를 용산에 두고, 남부수비관구에 보병 2ㆍ14ㆍ47연대, 한국파견기병대, 중포병대대를, 북부수비관구에 보병 13ㆍ23ㆍ27ㆍ45ㆍ64연대, 기병 6연대, 야포병 6연대, 공병 6대대를 배치했고, 1909년 6월에는 14연대 대신 보병 12여단과 보병 3연대를 영남에, 보병 1연대를 호남에 배치했으며, 경기ㆍ황해도 앞바다는 군함과 수뢰정을, 전남 앞바다는 수뢰정을 운용하였고, 전국에 헌병분대ㆍ분견소, 경찰서ㆍ주재소를 두고 헌병ㆍ경찰 5만여 명을 동원했으니, 일제가 러일전쟁 때 우리나라에 파견한 일본 군경 수보다 더 많았다.
일본 군경의 기록에 따르면,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일본 경찰이 간여한 의병진압 횟수는 1,976회, 의병수 82,767명, 순국자 5,721명이고,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일본군에 의해 순국한 의병이 13,445명이었다.
이는 전기의병과 을사늑약 전후부터 의병이 가장 거세게 일어났던 1907년 여름과 가을, 1908년 5월 이후부터 경술국치 전후까지 의병투쟁 통계가 나온 것이 아니기에 이를 보태면 일제침략기 의병 순국자와 부상자는 10만여 명, 투옥자는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