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연산군 이융 - 유교적 통치 이념을 거부한 비운의 폐왕
총서 / 32
불행의 씨앗을 품고 왕위에 오르다 / 32
성격이 집요하고 거칠었다 / 34
세자 시절 영의정 신승선의 딸과 결혼하다 / 35
강력한 절대 권력을 추구하다 / 35
1498년 무오사화를 일으키다 / 36
<실록기사> 1498년 7월 15일,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뢰기를 / 38
<실록기사> 1498년 7월 16일, 강귀손·유자광 등이 김종직에 관한 일을 논의하다 / 39
<실록기사> 1498년 7월 16일, 김종직이 도연명의 술주시를 화답한 내용과 이에 대한 대신들의 논의 / 40
<실록기사> 1498년 7월 17일, 김일손이 밝힌 김종직 제자들의 명단 / 45
<실록기사> 1498년 7월 17일, 사초 사건으로 김종직의 제자들을 국문할 것을 명하다 / 45
<실록기사> 1498년 7월 29일, 유자광에 대한 평가 내용과 무오사화의 전말 / 51
1504년 금삼에 깃든 피가 불러온 화, 갑자사화가 일어나다 / 54
<실록기사> 1504년 4월 1일, 폐비에 사약 내린 일에 관련된 자를 아뢰게 하다 / 57
<실록기사> 1506년 8월 15일, 폐비 윤씨의 기일에도 나인들과 음난 행위를 하다 / 62
궁녀 장녹수가 권세를 혼자 쥐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 / 62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다 / 64
<실록기사> 1506년 9월 2일,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 65
실패한 군주, 패륜 행위를 한 폭군으로 기억되다 / 75
강화도 유배 중 31세 나이로 죽다 / 76
<실록기사> 1506년 11월 8일, 연산군이 사망하니 대신들과 상사 문제를 논의하다 / 77
신들의 정원, 광해군묘와 폐비 윤씨 희릉으로 사진 여행 / 78
제11대 중종 이역 - 신하들의 반정으로 준비 없이 즉위한 왕
총서 / 83
<실록기사> 1506년 9월 9일, 장녹수 등을 참하고 폐주의 금인·화압·승
왕도 볼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 실록 속의 실록, 조선으로의 시간여행 …
조선의 역사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조선왕조실록」입니다. 임금이 재위한 기간 동안 있었던 모든 사실을 사관이 왕을 따라다니며 실시간으로 기록해 두었다가 왕이 죽은 후에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편찬하였습니다.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지요. 이 때문에 왕도 자기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왕은 좋은 평가를 받아 역사에 길이길이 남기 위해 바른 정치를 하려고 더욱 노력했지요. 만약 이 실록이 없었다면,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이처럼 자세히 알기는 힘들겠지요.
실록은 권질의 방대함과 아울러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군사·제도·법률·경제·산업·교통·통신·사회·풍속·천문·지리·음양·과학·의약·문학·음악·미술·공예·학문·사상·윤리·도덕·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입니다.
비록 지배층(궁중 위주의 관찬 기록이라는 한계성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사기史記입니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작성되었지요. 왕의 실록은 반드시 해당 왕의 사후에 작성되었으며, 임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습니다. 사관들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받아 사소한 사항까지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궁정을 중심으로 한 사건의 기록이어서 지방의 실정을 단적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흠도 있습니다, 또한 선조 때부터의 실록은 기사가 점차 간략하게 기록되었고, 또 붕당정치의 당쟁 때문에 내정에 관한 기사는 다소 조작 및 순화한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외교에 관한 기사는 꾸밈이 적고, 중국·만주·일본·유구琉球 등과의 교섭 기록도 매우 많이 존재하여 동아시아사 연구의 사료로도 많이 이용됩니다.
「왕도 보고 싶은 조선왕조실록」 중권은 10대 연산군 이융부터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