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프롤로그
인류는 언제부터 초상화를 그렸을까
중국 초상화 제작의 초기 흐름
우리나라 초상화 제작의 시작
예술성 높은 조선시대 초상화
특정 인물의 재현, 그 이상의 의미
주인공의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그림
1. 초상화란 무엇인가?
‘닮음’을 추구한 그림 1: 외형의 닮음
닮게 그린다는 것, <이시백 초상>
“터럭 하나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다”
<장말손 초상>과 <이시방 초상>의 차이
“어진(御眞은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없어야 합니다”
초상화 표현 기법의 큰 변화
‘닮음’을 추구한 그림 2: 내면의 닮음
과장된 묘사, <송시열 초상>과 <윤두서 자화상>
‘정신’을 담다, <강세황 자화상>과 <서직수 초상>
인자한 성품을 드러내다, <김정희 초상>
‘신명’이 깃든 그림
‘신명’의 힘, <이제현 초상>과 <하연 초상>
7년 만에 다시 그려진 <채제공 초상>
‘나’의 대체물
2. 초상화의 힘
‘환영’의 경험
“선생은 말이 없고, 제자는 눈물을 흘린다”
“구천(九泉에서 나오신 듯하네”
초상화 봉안과 서원의 건립
소수서원의 <안향 초상>
임고서원과 숭양서원의 <정몽주 초상>
노동서원의 <최충 초상>과 오봉서원의 <공자 초상>
선현(先賢 초상화의 힘
사당과 영당으로 옮겨 간 초상화
김시습영당, 청일사와 청절사
포은선생영당이 지어진 사연
초상화 봉안의 정치학
기념 공간에서 제향 공간으로
스승의 철학과 사상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이모본 초상화의 제작
이모본, 조선 후기 초상화 제작의 특징
<안향 초상> 이모에 들인 노력
<안향 초상> 재(再이모 과정의 전말
봉안과 보존의 가치
3. 기억과 추모의 그림
어진 목민관을 기리다
살아 있는 목민관을 제사 지내다
명나라 장수들이 요구한 생사당과 초상화
생사당 조성 유행의 시초, 이원익 생사당
평양에 조성된 생사당과 그들의 초상화
지방 화가들이 그린 젊은 목민관의 초상
생사당 난립의
닮게 그린다는 것 - “터럭 한 올이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은 화가에게 요구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누구라도 주인공을 단번에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닮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나라 유학자 정이(程?의 “터럭 하나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 된다.”라는 말이 자주 인용되었다. 이에 따라 화가들은 주인공의 모습을 더 닮게 그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회화 기법상의 큰 진전을 이루었다. 저자는 1700년을 전후하여 초상화 표현 기법에 일대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김진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김만중 초상〉(1600년대 말과 〈김진규 초상〉(1710년대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잘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리는 쪽으로만 초상화 기법이 발전해 나가지만은 않았다. 김진여가 그린 〈권상하 초상〉(1719은 서양의 명암법이 잘 반영되어 있어 사실적 재현 솜씨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보다 후에 그려진 진재해의 〈유수 초상〉(1726은 서양화법을 반영하지 않고 따뜻한 질감의 피부색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권상하 초상〉은 사실적이기는 하나 어둡게 그려진 반면, 〈유수 초상〉은 매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재현되었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 얼굴의 주름이나 잡티가 드러나지 않기를 원해서 사진을 보정하는 것처럼, 당대 사람들도 사실적인 그림만을 지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과장된 묘사로 내면을 드러내다 - 〈송시열 초상〉, 〈박세채 초상〉, 〈윤두서 자화상〉
외형 못지않게 내면 즉 주인공의 정신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도 중시되었는데, 이때는 주인공의 특징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부각한 경우가 많았다. 얼굴 곳곳의 굵직하고 구불구불한 주름, 붉은색의 두꺼운 입술, 무성한 수염과 눈썹, 큰 몸체 등 매우 강렬한 인상의 인물로 보이게 하는 〈송시열 초상〉, 떡 벌어진 어깨, 넓은 팔소매 등 덩치가 매우 커 보이게 그려져서 그의 제자가 “높고 큰 산의 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