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 간재 전우, 『중용』을 탐구하다》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중용기의(中庸記疑』를 국역한 책이다. ‘기의(記疑’란 의심스러운 것을 항상 마음에 새긴 후 기?록하는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전우가 『중용』을 탐구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책이다. 전우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미를 장식한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이다.
간재 전우는 어떤 인물인가
간재 전우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담양이다. 1841년 전북 전주 청석리(靑石理에서 태어나 13세 때까지 오서오경(五書五經을 두루...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 간재 전우, 『중용』을 탐구하다》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중용기의(中庸記疑』를 국역한 책이다. ‘기의(記疑’란 의심스러운 것을 항상 마음에 새긴 후 기록하는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전우가 『중용』을 탐구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책이다. 전우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미를 장식한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이다.
간재 전우는 어떤 인물인가
간재 전우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담양이다. 1841년 전북 전주 청석리(靑石理에서 태어나 13세 때까지 오서오경(五書五經을 두루 읽다가 14세에 부친을 따라 서울 정동(貞洞으로 옮겨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21세 때 부친의 명으로 충청도 아산(牙山에서 강학활동을 하고 있는 낙론(洛論 계열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문하에 나아가 유학사상을 익히며, 중국 송나라의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의 학문, 그리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학문을 면밀히 탐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우는 일본의 국권침탈을 목도하고서 육지에서의 활약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서해의 해도(海島로 들어가 후학을 양성하고자 하는 결의를 보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그는 노구(老軀임에도 왕등도(旺嶝島와 고군산도(古群山島, 신시도(新時島 등을 왕래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