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댜길레프, 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사에 큰 획을 그은 세르게이 댜길레프는 역사상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다시없을 독특한 인물로 평가된다. 발레 뤼스를 창단한 190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29년까지 그의 활동은 20년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20세기 현대 예술의 모든 논의가 빠짐없이 그의 이름으로 시작할 만큼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는 미술가도, 음악가도, 무용가도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를 그저 사기꾼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예술적 취향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1827년 상위 중산 계급인 지주 계층에서 태어난 댜길레프는 비교적 풍요롭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구화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비해 그가 자란 페름 지방은 거의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그는 ‘넵스키 픽윅키언’이라 불린 중상류층 법학도 무리와 친구가 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브누아의 말에서 우리는 댜길레프의 중요한 일면을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리 누구도 갖지 못한 한 가지 특징, 한 가지 능력이 있었고, 그것이 결국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뜻한 바를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지 알았고,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댜길레프가 처음 열정을 보였던 분야는 음악과 미술이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곡을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보여준 적이 있고,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미술에도 관심을 높여갔다. 또한 잡지 『예술세계』를 발행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들에게 아방가르드를 널리 알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유럽으로 눈을 돌려 “거의 알려지지 않아 저평가된 러시아 문화 상품을 서구 유럽에 소개하는 사업이 더 수익성이 좋을” 거라고 눈치 빠르게 인식했다. 그가 처음으로 선택한 곳은 유행을 선도하는 빛의 도시 파리였다. 그는 1906년 파리 살롱 도톤에 러시아 현대 미술 전시를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