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세기의 작품을 향하여
1장 길 위에서
장인의 아들 | 젊은 야수
2장 바람의 신부
단단한 윤곽으로 그린 과대망상의 스케치 | “독특한 베를린” | 사랑의 폭풍, 대양의 난파선 |
예술의 증인 게오르크 트라클 | 끝나지 않은 알마 피날레
3장 전쟁과 예술
릴케와의 만남 | 베를린, 드레스덴, 스톡홀름의 간주곡 | 신비주의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 알마 인형 |(#생략
4장 방랑자
드레스덴 시절 | 떠나고, 그리고, 사랑하고 | 낯섦을 향해 | 기만의 시대와 정치적 시각 |
토마스 만과 오스카 코코슈카 | 창밖의 프라하 | 변함없이 변화하는
5장 영국 망명
런던으로 | 풍경의 위안 | 행동가의 정치적 관심 | 마이스키의 초상화 | 무너진 기대 | 어린이를 위하여 |
보이지 않는 전망대
6장 표현 형식으로서의 초상화
전기로서의 초상화 | 얼굴 앞에서 | 음악의 초상 | 동물의 초상 | 권력의 초상 | 신화의 초상 |
서덜랜드가 처칠을 그렸을 때
7장 만년의 삶과 시각 학교
점진적 회복 또는 상실의 한가운데서 | 시각 학교, “자신의 눈을 떠라” | 다시 쓰는 그림, 덧칠하는 언어 |
오스트리아, 상처와 영광의 땅
나가며―코메니우스, 영원한 스승
되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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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무이한 예술적 궤적을 밟은 예술가
1886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푀흘라른에서 태어난 코코슈카는 빈에서 국립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미술 교사의 추천으로 국가 장학금을 받고 고등 직업 예술 학교인 빈 공예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학생 중에는 아돌프 히틀러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부터 코코슈카는 현대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돌프 루스의 영향을 받아 당시에 지배적이던 아르누보 양식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회화 기법과는 전혀 다른 대담한 구성과 강렬한 색채로 예술계에 충격을 안겼다. 그뿐만 아니라 《살인자, 여자들의 희망》과 같은 희곡을 발표해 빈 예술계의 악동, ‘최고 야수’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알마 말러의 남자 또는 알마 인형을 만든 남자
코코슈카의 이름이 예술계를 넘어 널리 알려진 이유는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 말러와의 강렬한 사랑 때문이다. 야성미와 교양을 겸비한 알마와의 관계는 코코슈카에게 창작의 원천이었지만, 이 사랑은 동시에 그를 파괴적인 집착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알마와 3년간 동거하는 동안 거의 병적인 집착과 질투심에 내몰린 코코슈카는 그녀와 관련한 450여 점의 예술 작품을 낳는 광란의 창작 활동을 벌였다.
코코슈카가 둘의 아이라고 믿으면서 반대했던 낙태 수술을 알마가 결행하면서 두 사람은 결국 결별에 이르렀고, 얼마 후에 알마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했다. 알마와의 이별은 코코슈카에게 두 가지 꼬리표를 남겼다. 하나는 <바람의 신부>라는 걸작의 작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마 인형’을 만든 남자라는 것이다.
<바람의 신부>(1914는 두 사람의 사랑과 갈등을 담은 작품으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붓놀림과 강렬한 색채로 가득 차 있다. 작품 속 신부는 알마를 상징하는데, 그녀를 떠올리며 느낀 희열과 고통이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알마를 잊지 못한 코코슈카는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실물 크기의 알마 인형을 인형 제작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