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돌보는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사회 | ‘여성의 일’이라는 딱지가 붙은 노동 | 감정에 비용을 지불하라 | 당신이 곧 그 노동은 아니다
감정 재생산
감정과 개인, 사회를 둘러싼 연결고리 | 사랑이라는 노동 | 죄책감에 기초한 노동관계 | 주 양육자 개념과 엄마의 역할 | 사회계층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 재생산 인식 | 느낌의 상업화 | 계량되고 통제되는 감정노동 |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단위, 가족
사랑의 정치학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력 | 한없이 복잡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돌봄노동 | 재생산 위기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 | 젠더에 기반한 매우 사적인 노동 | 우리에게는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의 젠더화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여성성 | 가정 폭력이라는 노동재해 |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에 가려진 노동 | 감정적 이타주의 | 타고난 다정함 | 좋은 삶과 행복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 | 남성은 이성적, 여성은 감성적인가? | 스펀지처럼 행동해야 하는 여성들 | 희생을 강요하는 노동
페미니즘의 감정
분노에는 정치적인 힘이 있다 | 투쟁의 힘을 더하는 자율성 | 이성애를 거부하는 목소리 | “우리는 충분히 일했다”
다른 느낌
평등이라는 공허한 외침 | 가족을 폐지하라 | 젠더 폐지 | 감정 재생산의 퀴어화 | 가족 너머로 나아가기 | 감정의 새로운 지평 | 새로운 공존으로 나아가는 길
참고문헌
돌봄: 생산적 노동의 한 형태(저자 인터뷰
우리는 왜 돌봄을 노동이라 부르지 못하는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두 가지 환상
- 가족 안에서만 정서 욕구를 완벽히 충족할 수 있다!
- 진정한 사랑에 의한 돌봄은 베푸는 자에게 보상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가족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우리의 정서 욕구는 가족 안에서만 완벽하게 충족되고 이를 대체할 수단은 없다. 또 이러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는 ‘이성애 결혼’에 의한 것이고 가정에서의 삶이 곧 ‘좋은 삶(good life’이다. 반대로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동성애나 가족을 벗어난 삶은 ‘나쁜 삶(bad life’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공동체와 가족은 시장 논리와 상관없는 사생활의 일부다.
로맨스 이데올로기는 진정한 사랑을 찾은 사람이 비로소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이 사랑이 정서적 욕구를 모두 충족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은 대부분 여성이 떠안아야 한다. 그 이유는 여성 본성에는 돌봄에 적합한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는 통념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여성의 돌봄 행위는 별로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돌봄을 제공함으로써 여성 스스로 심리적 보상을 받게 된다는 논리다.
보이지 않는 손의 마법: 돌봄을 노동이 아닌 사랑으로 포장한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
알바 갓비는 현재 우리의 삶에 깊숙하게 침투해 있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돌봄의 실체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포착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가족 이데올로기, 로맨스 이데올로기에 뿌리내린 자본주의에서의 돌봄이 왜 사랑이 아닌 착취인지, 여성이나 유색인종처럼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이런 이데올로기에 번롱되어 착취당하는 역할을 맡아 왔는지 역설한다. 또한 이 착취 구조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버팀목으로 기능하는 메커니즘을 짚어낸다.
돌봄은 사회에 필수적인 일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돌봄 부담을 덜어주는 노동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작동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