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연구 현황과 접근 방법
1장 낙랑·대방군의 소멸과 군현계 토착집단의 귀속
1. 고구려의 낙랑·대방군 공략과 두 군의 소멸 과정
2. 낙랑·대방군 고지 내 토착·외래 집단의 귀속
2장 4~5세기 화북 지역의 혼란과 이주민 집단의 유입
1. 화북 지역의 유이민 발생 추이
2. 4세기 고구려의 이주민 수용
3. 이주민의 낙랑·대방군 고지 안치
3장 고구려 체제하의 중국계 주민집단 편성
1. 이주민 집단의 정체성과 본적 표기
2. 이주민 집단의 인식을 반영한 관호官號
3. 이주·토착민을 포함한 군집群集의 편성과 그 배경
4장 중국계 주민집단의 전통과 지향
1. 낙랑·대방군 고지의 고분 속에 구현된 대외용 서사와 구성 의도
2. 고분 속에 보이는 정치·사회적 지향
3. 이주집단의 신앙·가치관과 ‘칠보행사도’
맺음말
보론 6세기 고구려의 북위北魏 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遊人’
1. ‘유인’ 관련 기사의 검토
2. 북위 말 유이민의 안치와 지배
민족국가의 틀과 일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거시적 공간에서 고구려를 이해한다
4세기 초반 이래 낙랑·대방군 고지(2군 고지, 현재의 황해도·평안도 일대에 외래 이주민 관련 고분들이 다수 나타나게 된 배경은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4~5세기에 화북 동북부에서 요서-요동-고구려로 이어지는 공간은 인적 유동(流動이 이루어지는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체가 공동의 이해관계를 놓고 상호 경쟁 및 연합을 이루기도 하는 지역적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정치적 격변과 혼란 속에서 중국 왕조의 변경에 있던 군현들이 차례로 소멸하는 과정, 그리고 1세기 가까이 지속된 거대한 유이민 파동과 이를 두고 화북의 주요 세력들이 이주민 확보를 위해 경쟁을 벌였던 현상 등은 동북부의 고구려에도 일정한 정책적 대응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다문화 이해공동체였다. 고구려라는 영역과 경계 내에서 정치·제도적 발전상에만 주목한다면 결코 고구려의 다원적 국가상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일국사적 관점과 국가의 성장, 지배체제 중심의 연구 시각에 갇혀 있던 고대의 다채로운 자료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4~5세기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넓은 영역과 그 내부의 다양한 종족들을 구성원으로 삼았던 고구려가 화북의 정치적 변동과 추이를 긴밀하게 파악하는 가운데 내부의 정책을 조율하고 적용했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고분 속 벽화와 묵서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주민 집단의 존재 양상과 주민 구성
4세기 초반 서진(西晉 왕조의 붕괴와 동시에 화북 일대가 큰 혼란에 빠지면서 많은 유이민이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화북의 이주민을 자국에 유치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에도 화북에서 유입되는 이주민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을 수용하는 데는 고구려 정권의 의도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고구려가 이 이주민들을 2군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