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도서 약어표_24
일러두기_41
5책-1 선교의 점진적인 발전과 개별 그리스도인의 증가(1603년 2월부터 1610년 5월 10일까지, 그리고 1611년 11월 1일까지
제1장 순찰사 알렉산드로 신부가 어떻게 일본에서 마카오로 오게 되었는지, 중국에 어떻게 다시 물건을 보냈는지, 마누엘 디아즈 신부가 다른 6명의 예수회원과 어떻게 마카오로 돌아왔는지에 대해(1603년 2월 10일부터 1604년 8월 15일까지 47
제2장 마태오 리치의 출판 작품들로 인해 우리와 그리스도교가 얻은 공신력에 대해(1584년 10월부터 1608년 2월까지 74
제3장 1604년 서 바오로 박사가 북경에서 어떻게 진사 시험에 통과하고 진 마르티노가 어떻게 무관이 되었는지에 대해, 그 외 북경에서 그리스도교와 관련한 일들에 대해(1604년 4월 초부터 1605년 2월까지 115
제4장 왕국 밖에서 들어온 많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중국에서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들이 여전히 ‘십자가 신봉자’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는 것에 대해(1605년부터 1608년까지 127
제5장 이 시기에 소주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1603년부터 1605년까지
149
제6장 이 시기에 남창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1601년부터 1605년까지
162
제7장 그 시기에 남경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구태소가 이냐시오라는 이름으로 개종한 것에 대해[1605년 2월 말부터 1605년 12월(?까지]175
제8장 북경 수도원에서 추진하는 일의 성과와 더 크고 편안한 집을 매입한 것에 대해, 바오로 박사가 마태오 리치와 함께 어떻게 『기하원본』을 번역하고 출판하게 되었는지에 대해(1605년 초부터 1607년 6월까지188
제9장 중국과 일본의 순찰사며 중국선교의 첫 발기인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죽음에 대해(1605년 중후반부터 1606년 1월 20일까지 213
제10장 우리가 광동(廣東에서 겪은 큰 시련과 그로 인해 광주에서 프란체스코 마르티네
『리치 원전(Fonti Ricciane』은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가 사망하기 전 3년 동안(1607~1610, 중국선교를 시작한 1583년부터 일자별로 상세한 활동을 기록한 “그리스도교의 중국 진출기”다.
본서는 당시 중국 관련 정보는 물론 근대 초, 최초 서양인의 눈에 들어온 극동 아시아의 상황과 국제정세 및 동서양이 먼저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원전에 각주를 꼼꼼하게 넣어 정리, 기록한 예수회 중국학자 델리야(Pasquale M. D’Elia S.I., 1890~1963 덕분에 책이 유럽으로 전해진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유럽 사회의 지식층과 사회 전반에서 아시아에 관한 관심과 영향을 알 수 있다. 중국에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조선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일본에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을 불러일으키는 근거가 되었고, 서양에는 계몽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동양에서 서양에 관한 관심은 선교사들의 서양문화 전수를 통해서지만, 서양에서 중국에 관한 관심은 이 책이 유럽에 전해지면서부터였다.
리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적응주의’ 방식에 따라 ‘문화 대화’, ‘문화 외교’를 주도함으로써, 동서양 교섭이 양쪽에서 문화창발(文化創發의 계기가 되는 데 기여했다. 다양한 문화와 문명이 다원적이고 포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구가 족 시대에 화합과 공존을 표방한 세계시민(global citizenship의 모델이자 문화 교류의 방향을 보여 주었다. 그가 원칙으로 삼은 ‘적응주의’는 단순한 맞춤형 선교전략이 아니라, 타자를 대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1910년 이탈리아 정부는 마태오 리치 서거 300주년을 기해, 동서양 문명의 가교가 된 ‘이탈리아의 위대한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이 책을 감수하여 발간하였다. 사업의 총책임은 예수회 소속 중국학자 델리야(Pasqu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