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도서 약어표_24
일러두기_40
2책 I. 조경(肇慶 = 소흥 수도원(1583년 9월 10일부터 1589년 8월 초순까지
제1장 우리가 어떻게 중국에 처음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1552년부터 1582년까지 45
제2장 1년이 채 안 되어 3명의 신부가 중국으로 들어갔으나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1582년 3월 9일부터 1583년 8월 10일경까지 90
제3장 신부들을 어떻게 조경으로 불렀는지에 대해, 수도원을 지을 작은 땅을 얻고 중국에 체류할 수 있는 허가를 얻다(1583년 8월 15일 즈음에서 1583년 9월 말까지 120
제4장 신부들이 서서히 중국인들에게 성교회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다(1583년 10월부터 대략 1584년 11월 25-29일까지 148
제5장 미켈레 루지에리 신부가 마카오에 가고, 마태오 리치가 조경에 오다. 청동으로 된 시계와 중국어로 표기한 지구본을 통감에게 주다(1583년 12월부터 1584년 10월까지 166
제6장 신부들이 어떻게 스페인 왕의 대사 자격을 획득하여 중국에 왔는지, 그리고 프란체스코 카브랄 신부가 어떻게 조경에 왔는지에 대해(1584년 5월 2일부터 1584년 11월 26일경까지 187
제7장 이 사업을 위해 두 명의 신부가 어떻게 인도에서 왔는지에 대해: 한 사람은 두아르테 데 산데 신부로 선교회의 원장으로 있다가 조경 체류 허가를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안토니오 달메이다 신부로 미켈레 루지에리 신부와 함께 절강성으로 가다(1585년 4월 1일부터 1586년 4월까지 201
제8장 신부들이 절강성으로 돌아오고 루지에리 신부가 광서에서 나가다: 그 밖에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1586년 7월부터 1587년 7월까지 217
제9장 신부들이 조경에서 나쁜 일에 연루될까 두려워 두아르테 데 산데 신부를 마카오로 돌아가게 한 영서도; 이 일이 있고 난 뒤 신부들이 겪은 큰 어려움에 대해(1587년 7월 27일부터 1587년 12월까지 230
제10장 미켈레
『리치 원전(Fonti Ricciane』은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가 사망하기 전 3년 동안(1607~1610, 중국선교를 시작한 1583년부터 일자별로 상세한 활동을 기록한 “그리스도교의 중국 진출기”다.
본서는 당시 중국 관련 정보는 물론 근대 초, 최초 서양인의 눈에 들어온 극동 아시아의 상황과 국제정세 및 동서양이 먼저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원전에 각주를 꼼꼼하게 넣어 정리, 기록한 예수회 중국학자 델리야(Pasquale M. D’Elia S.I., 1890~1963 덕분에 책이 유럽으로 전해진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유럽 사회의 지식층과 사회 전반에서 아시아에 관한 관심과 영향을 알 수 있다. 중국에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조선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일본에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을 불러일으키는 근거가 되었고, 서양에는 계몽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동양에서 서양에 관한 관심은 선교사들의 서양문화 전수를 통해서지만, 서양에서 중국에 관한 관심은 이 책이 유럽에 전해지면서부터였다.
리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적응주의’ 방식에 따라 ‘문화 대화’, ‘문화 외교’를 주도함으로써, 동서양 교섭이 양쪽에서 문화창발(文化創發의 계기가 되는 데 기여했다. 다양한 문화와 문명이 다원적이고 포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구가 족 시대에 화합과 공존을 표방한 세계시민(global citizenship의 모델이자 문화 교류의 방향을 보여 주었다. 그가 원칙으로 삼은 ‘적응주의’는 단순한 맞춤형 선교전략이 아니라, 타자를 대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1910년 이탈리아 정부는 마태오 리치 서거 300주년을 기해, 동서양 문명의 가교가 된 ‘이탈리아의 위대한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이 책을 감수하여 발간하였다. 사업의 총책임은 예수회 소속 중국학자 델리야(Pasqu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