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1부_ 법흥왕 인터뷰:
아버지와 아들, 강국 신라를 향한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다
풍수는 개혁의 산물이다
지증 마립간, 신라 개혁의 횃불을 들다
법흥왕, 아버지의 개혁 정책을 확대 계승하다
강국 신라를 향한 개혁의 방점을 찍다
2부_ 법흥왕 인터뷰:
급진 개혁의 마지막 산물, 무덤 조영의 풍습을 혁신하다
돌무지덧널무덤, 거대한 봉분과 화려한 껴묻거리
내 무덤을 산 아래에 만들어라
법흥왕릉 여행, 풍수의 원형을 만나다
신라 왕경 도시 계획의 기반을 마련하다
3부_ 진흥왕 인터뷰:
신라 왕경의 풍경과 도시 계획, 새로운 역사 상식을 세우다
높고 웅장하고 화려한 월성의 건축물, 상상해 본 적 있는가?
황룡사, 세계의 중심에 높고 웅장하며 화려하게 만들다
신라 왕경의 도시 계획, 사고의 사대주의를 버려라
경주 시내 도시 계획의 확장 토대를 만들다
4부_ 선덕여왕, 문무왕 인터뷰:
풍수가 사찰로, 크고 웅장한 목탑에서 작은 석탑으로 바뀌다
북천의 수호신, 분황사를 만들다
거대한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다
감은사의 건설, 탑이 작아지다
하늘-산-감은사의 3단계 풍경
5부_ 문무왕, 김대성 인터뷰:
풍수사찰의 확산,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 석탑이 만들어지다
월지정원, 조선에선 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인공 정원
밖에서 보이지 않는, 산속에 폭 안긴 불국사
삼층 석탑이 늘씬해지다
다듬는 것보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다
도판 출처
풍수는 신라의 정치, 사상 개혁의 산물로 법흥왕 때 탄생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풍수는 언제 무엇을 계기로 발생 또는 도입되어 정착하고 확산한 것인가?
중국에서 발생한 풍수가 신라 말 도선(827~829년과 그 제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입되어 널리 보급되고 뿌리를 내렸다거나,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에 풍수가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토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민간에서부터 풍수가 형성되어 받아들여졌으며, 풍수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동아시아 또는 우리나라의 자연관으로 보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인식이라면 역사적 ‘계기’를 묻는 앞의 질문이 생소할 듯하다.
조선의 수도 서울은 역성혁명에 의한 왕조 교체의 정당성이 집약된 공간이다. 어떤 이는 유교 이념으로 만들어진 도시였다고 여기지만 착각이다. 입지 선택부터 풍수가 가장 핵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너무나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통 문명에서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어떤 사상이 뒷받침하려면 임금이 하늘의 명을 받아 세상 또는 국가를 다스린다는 상당히 세련된 논리 구조를 갖춰야 한다. 토속신앙이나 민간에서 시작된 사상이 그럴 수 있을까? 물론 풍수를 연구하거나 믿는 사람들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 구현된 풍수에서 ‘하늘’을 보지 못했으니 그런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풍수도시인 서울의 입지, 구조, 상징 풍경, 정원의 특징을 담았던 『산을 품은 왕들의 도시』 1편과 2편의 후속 작이다. 필자는 앞의 두 책에서 풍수가 ‘권위 있는 공간 찾기 이론’이며, 서울에서는 ‘임금이 하늘의 명을 받아 세상 또는 국가를 다스린다는 이데올로기를 구현한 사상 또는 이론’임을 체계적으로 보여 드렸다. 하지만 이런 풍수가 언제 왜 발생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의 수도 서울에 이르게 되었는지까지 담을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그 과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책에서 완결성을 갖춰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