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았던 젊은 시절 18
二 경(敬하는 공부를 위주로 한 까닭 29
三 삶의 원칙으로 삼은 경계의 말들 46
四 <소학(小學>, 집안에 거처할 때의 도리 64
五 때를 만나지 못한 은자(隱者 77
六 백성의 고통을 잊을 수 없었던 뜻 89
七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여 99
八 부귀가 아니라 학문과 덕(德을 기준으로 120
九 공부란 오직, 스스로 터득하는 것 134
十 아래에서 사람의 일을 배우는 하학(下學 155
十一 두개골이 갈라지고 사지가 찢기더라도 167
十二 암울한 시대, 학문하는 자의 길 182
절목별 출처, 번역 원본 수정 사항 203
지금 우리가, 이 언행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
조식은 실천을 강조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조식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실천했을까요? 일상생활에서 조식이 실제로 보여준 모습은 어땠을까요? 이 [조식 언행록]은 공부한 것과 행동한 것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조식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이 [조식 언행록]의 원래 제목은 [남명선생 언행총록(南冥先生言行總錄]입니다. 인조 때의 학자 박인(朴絪 ; 1583~1640이 편찬했습니다. 박인이 이 언행록을 편찬한 것은 조식의 아들 조차마(曺次磨의 부탁을 받고서였습니다. 1628년 조차마는 박인을 찾아와 조식의 연보와 사우록 편찬을 부탁했습니다. 이 무렵은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 정권이 몰락한 이후 조식의 제자들이 크게 위축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조식은 글을 쓰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조식에 관한 자료는 그 학문적 위상에 비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식의 재전제자였던 박인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조식의 모습을 생각하며, 조식 관련 자료 수집과 언행록 편찬 작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박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참람하게 이 일을 했습니다. 이에 여러 선생들의 문집을 참고하고 또 여러 사람들이 듣고 본 일을 두루 조사했습니다. 선생의 남아 있는 행적을 찾았습니다. (無狀僭不自 乃考諸先生文集 旁搜聞見遺事 [산해사우연원록 서문(山海師友淵源錄序]”
박인은 특히 조식의 벗 성운(成運이 쓴 [남명선생 묘갈문(南溟先生墓碣],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쓴 [남명 조선생 행장(南冥曺先生行狀], 제자 김우옹이 쓴 [남명선생 행장(南冥先生行狀]과 [남명선생 언행록(南冥先生言行錄] 등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김우옹의 [남명선생 언행록] 같은 경우는 그 내용을 거의 대부분 가져와 이 언행록에 반영했습니다. 조차마의 부탁을 받은 지 8년 후인 1636년, 마침내 [남명선생 연보],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