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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 - 와이비 아카이브 2
저자 지수걸
출판사 역사비평사
출판일 2024-09-27
정가 32,000원
ISBN 978897696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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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부 공주 점거투쟁의 배경
제1장 갑오변란 이후 시기 일본과 갑오정권의 동학군 탄압 정책
제2장 공주 점거투쟁 전후 시기 공주(호서의 지역 사정과 동학군 활동

2부 공주 점거투쟁의 전개 양상
제1장 남북접 연대의 성사와 공주 점거투쟁 합의
제2장 공주 점거투쟁의 시기별 추이
제3장 남북접 동학군의 해산과 집단학살
제4장 항일연대의 실패와 호서 유생들의 반동학군 활동

3부 공주 점거투쟁의 성격과 의미
제1장 동학군의 집단정체성 재론
제2장 1894년 어셈블리와 19세기 후반의 도회·의거 문화

결론

그들은 왜 공주를 점거하고자 했나
― 서울 진격이 아닌 공주 점거를 택한 이유: ‘광장’으로서의 공주

공주 점거투쟁 시기 남북접 지도부가 현실투쟁의 목표를 서울 진격이 아니라 공주 점거로 설정한 것은 1차 봉기 시기 전주성 점거와 담판 경험 때문이었다. 전주성에서 동학군은 군중집회와 무장시위 등을 통한 대중적인 어셈블리(모이고 모으기 투쟁에 힘입어 전주성을 전격적으로 점거할 수 있었다. 전주성을 점거한 뒤 지도부가 전라감사, 초토사, 순변사 등을 상대로 나름의 정치협상이나 담판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명분이 뚜렷했을 뿐만 아니라 호남 사람들의 지지와 성원이 그만큼 크고 넓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경험에 기초해볼 때, 남북접 지도부가 일본군과 관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있는 유일한 대안은 남북접 동학군이 연대하여 공주를 점거한 뒤 일본과 조선 정부를 상대로 정치협상이나 담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공주는 당시의 정세와 조건을 감안할 때 남북접 동학군이 선택할 수 있는 A/O 투쟁의 최적지였다.

한국사 교과서처럼 공주 점거투쟁을 서울 진격을 위한 중간전투로 이해할 경우, 점거 대상이 왜 하필 공주였을까라는 질문은 우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정학적 특성상 진입과 점거가 용이하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남북접 동학군이 한 달여 동안 총력을 기울여 공주 점거전을 벌인 이유는, 당시의 조건과 정세를 감안할 때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장 적절한 도회처, 즉 A/O 투쟁의 적지(適地가 바로 공주이기 때문이었다.

“죽이지 말고, 헤치지 말고, 살아가며 싸우자”
― 용감한 투쟁과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집단학살의 결과

공주 점거투쟁 실패 이후 남북접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포위섬멸전에 대응하여 퇴각을 서둘러야 했다. 태인싸움(11월 27일을 끝으로 전봉준이 동학군의 해산을 선포했고, 이는 공주 점거투쟁이 공식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피해 땅끝까지 내몰린 동학군은 장흥, 해남 등지에서 마지막까지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