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서문
경계와 바깥의 사상
핵심저작
【김시습】
1장 나는 누구인가
유양양에게 진심을 토로해 올린 편지 │ 「이소」를 본떠 짓다 │ 동봉의 여섯 노래 │ 답답한 마음을 서술하다 │ 나의 삶 │ 도서명 │ 남명 │ 북명 │ 곤궁한 삶에 대한 잠 │ 자화상에 붙인 찬
2장 자연철학
태극을 논함 │ 생사를 논함 │ 귀신을 논함 │ 무극음 │ 자연음
3장 정치사상
군주는 어떠해야 하는가 │ 신하의 도리 │ 정치의 근본은 애민이다 │ 나라의 근본 │ 만물을 사랑하는 도리 │ 은거하는 것과 벼슬하는 것 │ 고금의 충신과 의사 │ 정치는 반드시 삼대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 군자와 소인 │ 인재가 없다고? │ 나라의 재물을 늘리는 도리 │ 명분이란 무엇인가 │ 덕행에 대하여 │ 백이·숙제를 찬미하다 │ 백이·숙제 │ 천지편
4장 불교·도교에 대한 관점
『청한잡저 1』 │ 『청한잡저 2』 │ 「남염부주지」 │ 『임천가화』 │ 『잡설』 │ 계인설 │ 이단변
5장 불전 해석
『연경별찬』 │ 『십현담요해』 │ 『대화엄일승법계도주』 │ 『수능엄경』 발문 │ 『법화경』 발문
【서경덕】
1장 사상의 거소
중종대왕에게 올리려던 사직소 │ 부기: 『중종실록』에 나오는 서경덕에 대한 사관의 평 │ 박이정에게 답한 편지 1 │ 박이정에게 답한 편지 2 │ 박이정·박군실에게 답한 편지
2장 자연철학
이기의 본원을 밝힘 │ 이기를 논함 │ 태허를 논함 │ 귀신과 사생을 논함 │ ‘복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한 데 대해 논함 │ 온천에 대해 분변하다
3장 상수학
성음을 풀이하다 │ 앞의 「성음을 풀이하다」의 미진한 곳에 대한 보충 │ 『황극경세서』의 수를 풀이하다 │ 〈64괘 방원도〉를 풀이하다
4장 학문론과 수양론
박이정 자설 │ 김사신 자설 │ 부기: 명종 15년 김한걸이 강원도 고성 군수로 있을 때 올린 「진군폐소」 │ 심 교수에게 주는 송서 │ 부기: 심 교수
종횡무진 사상의 경계를 넓혀간 두 사람의 천재, 김시습과 서경덕
김시습이 어린 시절 신동으로 회자된 것은 유명하다. 당시의 국왕 세종이 그 소문을 듣고 승정원 승지를 시켜 김시습의 글쓰기 재능을 시험해봤다. 역시나 세종 또한 그 재능에 탄복해 찬사를 보내는데, 이때의 경험을 통해 김시습은 여생 내내 “세종에 대한 의리”(16면를 품고 산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격렬히 통곡하고 이후 8년간 방랑의 길을 떠난 이유도 그런 세종의 은혜를 되새겼기 때문이다.
8년간의 방랑기 동안 김시습은 백성들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한다. 이는 그가 국가와 인민에 대한 정치사상에 관한 글을 쓰고 민본적 철학을 개진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민본적 철저성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래의 김시습의 실존에서 기인한다.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체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체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체제의 안과 밖 사이의 ‘경계’에서 체제를 비판적으로 조망했다. 그 결과 인민과 군주와 국가에 대한 이런 통찰이 나올 수 있었다.”(20면 또한 김시습은 유교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 관해서도 탐독하며 종횡무진 자기 사상의 경계를 넓혀갔다. 그러고는 경주 금오산으로 가서 8년간 지낸 뒤(『금오신화』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서울 수락산 기슭에서 지내며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 관련 책을 짓고 그 뒤로는 관동(강원도 양양 등지에 가서 남은 생을 보낸다.
김시습이 유교, 불교, 도교를 넘나들었다는 세간의 평에 대해 편저자 박희병은 그보다는 “김시습의 사상 내부에 노장사상이 일부 들어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제한적”(25면이라고 지적한다. 정확하게는 그가 유교와 불교를 적극적으로 회통시키면서도 도교에 대해서는 꽤 부정적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이 책 전반에서는 김시습이 조선 승려들의 명예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수행을 강조하면서 불교에 관한 미신적 사고를 철저히 물리치려 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