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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 -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 총서 4
저자 이태룡
출판사 광문각
출판일 2024-08-27
정가 15,000원
ISBN 9791193965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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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서문

Ⅰ. 3·1독립운동, 33인의 민족대표, 그 역사적 위상
  - 김창수/전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Ⅰ. 머리말
  Ⅱ. 3·1독립운동과 민족대표 33인의 역할
  Ⅲ. 민족대표 33인의 의거 준비와 그 성격
  Ⅳ. 맺음말

Ⅱ. 이갑성의 항일독립운동과 문화 투쟁
  - 유준기/전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Ⅰ. 머리말
  Ⅱ. 이갑성의 생애와 3·1독립운동에서의 활동
  Ⅲ. 3·1운동 이후의 문화 투쟁
  Ⅳ. ‘친일 관련설’에 대한 검토
  Ⅴ. 맺음말

Ⅲ. 3·1운동 배경과 연당 이갑성의 역할
  - 이태룡/국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Ⅰ. 들머리
  Ⅱ. 기미년 독립선언
  Ⅲ. ?선언서? 배부와 독립만세시위
  Ⅳ. 마무리

Ⅳ. 3·1운동 이후 연당 이갑성의 독립운동
  - 이정은/(사 3·1운동기념사업회장

  Ⅰ. 머리말
  Ⅱ. 1920년대 민족운동 시기
  Ⅲ. 1930년대 상해 활동 시기
  Ⅳ. 맺음말

Ⅴ. 해방 후 연당 이갑성의 삶 재조명
  - 허동현/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국사편찬위원장

  Ⅰ. 서론
  Ⅱ. 해방 후 정치 활동
  Ⅲ. “친일 밀정설”의 제기와 유포 경위
  Ⅳ. 결론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919년 2월 경성의 학생대표를 규합하고, 종교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마침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언서를 내고, 경성뿐만 아니라 함남 함흥, 경북 대구, 경남 김해·마산, 전북 군산 등지에도 학생을 보내 선언서를 배부하여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연당은 그 후 붙잡혀 1922년 5월까지 3년여 옥고를 겪은 후 1924년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강연하다가 또 붙잡혀 2년(1928-1930, 신간회 간사로 활동하다 6개월(1931 고초를 겪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제중약방(濟衆藥房’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일제 관헌에 붙잡혀 1년(1937-1938, 흥업구락부 활동으로 7개월(1940,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한 여러 혐의로 11개월(1941, 8개월(1942, 4개월(1943, 3개월(1945 등 오랜 기간 경찰서와 감옥(형무소 전신·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연당은 초대 민의원과 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광복회(光復會’ 초대 회장을 거쳐 제2대 회장에 당선된 직후 난데없는 “친일 밀정설”에 휩싸였다.
1967년 5월 11일자 대한신문 광고란에 “광복회 비상총회 회원 일동” 명의로 실린 변절 및 민족 반역자 이갑성의 죄상 일부를 공개함이란 성명서였다.
광복회는 대한신문을 통해 반박문을 싣는 등 공방이 법정으로까지 번져 광고를 내었던 조경한 등이 명예훼손죄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고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1981년 연당이 작고한 직후 자유 3월호에 다시 이 내용들이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다시 실림으로써 연당을 “친일 밀정설”에 빠지게 하였고, 이어 임종국은 1988년과 1990년에 ‘이갑성은 상하이에서 밀정했다는 설이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는 등, ‘설(說’이 확대 재생산되자, 광복회와 학자들은 진실 규명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경성공업사는 일부에서 주장하듯 일본의 군수공장이 아니고, 미국인 모리스(J.H.Morris가 사장으로 자동차와 그 부품을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