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해설
I. 러스킨과 근대
「삶과 그 예술의 신비Mystery of Life and its Arts」에서 러스킨은 자신의 삶을 실망과 좌절의 연속으로 개관한다. 그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 그의 “삶의 가장 강렬한 10년” 동안, 레이놀즈(Joshua Reynolds 이후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터너(J. M. W. Turner의 예술가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더군다나 터너는 이 노력의 “피상적 효과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사망했다. 러스킨은 탁월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헛되이 창작하다 헛되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터너는 러스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러스킨은 회화 연구를 하면서 건축 연구를 병행했다. 자신의 말로는 회화 연구에서보다 “덜 열심일지는 몰라도 더 신중한 노력”을 투여했다고 한다. 러스킨은 건축의 경우에는 회화의 경우와 달리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한 러스킨의 노력도 (이미 당대의 건축계 주류와의 관계를 언급한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대세에 밀려서 좌절되었다. “우리가 도입하려고 한 건축은 현대 도시들의 분별 없는 사치, 형태를 왜곡하는 기계적 구조, 지저분한 비참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 나는 나의 힘의 이 새로운 부분 또한 헛되이 쓰였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철로 된 거리들과 수정으로 된 궁전들에서 물러나 지질학과 식물학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
그 이후에도 영국의 주류 사회는 러스킨에게 도통 맞지 않는 곳이었다. 러스킨은 당대의 현실로 관심을 돌리면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나아갔는데, 이 비판 또한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에게는 당연히 못마땅한 것이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860년에 일련의 정치경제학 비판 글들이 『콘힐 매거진Cornhill Magazine』에 연속으로 실리다가 (편집자의 우호적인 태도와 과감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과 출판사의 반대로 네 편에서 중단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