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대들이 찾는 살아 숨 쉬는 기록물 |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펴내면서
1. 나의 고향 하의도와 목포
2. 혼돈과 역경의 시간들
3. 시련 속에서 꽃피운 의정활동
4. 민주세력의 리더로 떠오르다
5. 유신독재에 맞서다
6. 서울의 봄부터 13대 대선
7. 13대 국회부터 15대 대통령 당선
8. 한국경제의 위기 극복과 새로운 도약
9. 민주인권대통령
10.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시작
11.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외교
12. 후배 정치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
감사의 말씀 | 김홍업·김성재
한국 정치의 나침반이자 항해도 | 류상영·장신기·박명림
김대중 대통령 연보
김대중 대통령 육성 연설 QR코드 목록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까지,
하의도와 목포에서 얻은 정신적 자산
“내가 나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질문지를 받으면 꼼꼼하게 살펴보고 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당시 하의도는 농지 대부분이 기존 지주들의 탐욕에 의해서 결국 일본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였고 농민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작쟁의를 일으켰던 곳이었다. 저항 정신이 있는 지역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아버지는 마을의 구장이었다. 덕분에 『매일신보』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면을 열심히 읽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의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김대중 대통령은 공부를 위해 목포로 이사했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7대 도시에 들어갈 정도로 큰 규모의 항구도시였다.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김대중 대통령은 웅변에 소질을 보였다. 2학년 담임 무쿠모토 선생님은 “김대중의 웅변은 일본 대의사가 의사당에서 한 것에 못지않다”며 칭찬했다. 졸업 이후 목포 전남기선에서 일하다 해운 사업을 했다.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상업도시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해운회사와 『목포일보』를 경영하면서 경제의 흐름을 배우고, 회계를 비롯한 각종 경제 지식까지 깨우쳤다. 이때의 경험은 국회의원이 된 후 정책 수립과 예산 심의를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 직후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거리에 붙이고 다녔던 것, 목포공립상업학교에서 철수 전의 일본군과 학생들이 충돌했을 때 소방차를 타고 가서 중재했던 것, 1946년 대구 10·1 사건 때 목포 지역 정치적 라이벌의 무고로 구금당했던 것 등 다양한 젊은 시절 일화가 등장한다.
사업 대금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강을 건넌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