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잃고 성장통을 겪는 당신에게
화병은 본디 품격 넘치는 가게의 얼굴 노릇을 하던 물건이었습니다. 연말이면 흔해 빠진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세련된 크리스마스 장식을 매단 나뭇가지들을 꽂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곤 했지요. 그런데 그 크리스마스 장식이 사단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툭 떨어지면서 화병 입구가 깨지고 만 것이지요.
가게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놓여 있던 화병은 하루아침에 춥고 어두운 거리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요.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쓰레기 더미와 함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화병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게 근처에 사는 할머니였지요.
할머니는 화병을 집으로 가져가 먼지를 씻어 내고 바닥에 구멍을 뚫고 흙을 담더니 볕 잘 드는 베란다에 내놓습니다. 하지만 화병은 쿰쿰한 흙냄새와 스멀거리는 벌레들, 너저분한 물건들로 가득한 베란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화병을 저희 멋대로 ‘10번’이라고 부르는 화분들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입니다. 화분 같지도 않은 화분들과 섞여 지내야 하는 제 신세가 한심하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베란다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의 쓸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화병이 미처 알지 못했을 뿐 화분들에게도 반짝이던 지난날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지내던 포도주병, 바닷가 카페에서 손님들과 함께 노을을 즐기던 칵테일 잔, 구수한 옥수수차를 우려내던 주전자, 할머니 집안의 장맛을 책임지던 된장독까지…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제 이름과 쓸모에 걸맞은 멋진 삶을 살아왔지요. 하지만 빈 병이 되고 손잡이가 녹아내리고 금이 가고… 저마다의 이유로 쓸모를 다하고 할머니의 베란다로 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화분들이라고 지난날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닐 테지만, 그 누구도 지난날에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더는 와인을 담거나 차를 우려내거나 장을 익히지는 못해도 대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