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무왕 시대의 융과 풍
부여융의 출생과 백제 기년법
부여풍의 출생
무왕은 누구인가
국제 결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익산 왕도
익산에 소재한 ‘궁남지’
미륵의 세상, 그리고 낙토로 가는 이상향
2. 의자왕 시대의 융과 풍
의자왕의 등장
부여융의 등장
「부여융 묘지」
정변과 부여융
비운의 폐태자 융
의자왕의 남은 5년, 음황과 탐락의 세월
패망과 의자왕의 책임
백제 최후의 날, 공산성과 예씨?氏 일가의 동향
예식과 예식진은 동일 인물인가?
백제 멸망 당시 예식진·예군 행적
의자왕이 항복한 이유
3. 멸망을 막으려는 공주
미녀 공주의 등장
여성 전사戰士의 전형
계산 공주 설화는 구전인가?
4. 국가 회복을 위한 융과 풍
거인, 세상을 건너 가다
의자왕대에 대한 평가
‘부흥운동’ 용어
융과 풍왕 정권의 성격
구국의 영웅 복신
승려 출신 의병장 도침
풍왕의 환국
풍과 융 사이에서 고뇌하는 흑치상지
「흑치상지 묘지」
백제 지원 위한 왜의 동향
고구려는 백제를 지원했는가?
내분의 폭발
흑치상지의 향배
5. 백강과 주류성 위치
연구사 백강 비정
연구사 주류성 비정
주류성 위치
백강과 주류성 위치 비정의 관건
6. 지자체의 지역 정체성 확인
홍성군
당진시
서천군
청양군
세종시
정읍시
부안군
7. 동아시아 대전大戰, 백강 전투
백강 전투가 지닌 의미
백강 해전과 백제군·왜군의 참담한 패배
백강구 전투의 승패 요인
행방이 묘연했던 풍왕
백제인들 최후의 항전
8. 백제 옛 땅의 융왕과 고구려에서의 풍왕
웅진도독부의 귀속 문제
한반도 내 웅진도독부의 해체 시점
9. 당에서 재건된 백제
‘내번內蕃 백제’
풍왕의 마지막 모습과 유배지 기원설 …… 219
10. 한반도 백제 유민들의 동향, 그리고 에필로그
세종시 연기 지역 유민들의 동향
만들어진 제의祭儀, 은산별신제
에필로그
참고문헌
색인
융을 수반으로 한 친당 정권과 풍을 왕으로 한 친왜 정권이 백강 전투에서 맞붙었다.
주류성마저 함락된 후 형제의 운명은 끝내 승자와 패자로 갈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로 라이벌’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거나 듣고 있다. 라이벌의 사전적 의미는 ‘같은 분야에서 또는 같은 목적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사상의 라이벌’이라는 용어도 흔하게 사용해 왔다. 동일한 목적을 지녔지만 서로 대척점에 섰던 백제 의자왕의 두 아들만 한 라이벌이 있었을까?
부여융과 부여풍은 모두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7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치 질서가 재편되는 급변기를 맞아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했던 두 왕자의 인생행로는 굴곡 그 자체였다. 백제 사신단의 수석인 23세 미남 청년 융은 ‘대당大唐’의 궁정을 밟았다. 압도하는 제궐帝闕의 웅위한 모습, 천하의 영걸이자 노회한 태종 알현과 휘황한 채색 비단 3천 단을 하사받고 득의에 차서 귀국선에 몸을 실었던 순간은, 환희와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영광스러운 장면이었음이 분명했다. 융이 친당親唐의 길을 걸었고, 당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대척되는 삶을 살았던 자신의 아우가 풍이었다. 풍은 어린 시절 왜로 파견되었다. 풍은 왜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631년에서 661년까지 어언 30년, 한 세대 동안 왜에서 체류하였다.
백제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책봉을 요청해야 할 주체요 영향력이 극대한 중원의 당 제국, 그리고 전통 우방이 왜였다. 융과 풍은 백제가 절대 홀시할 수 없는 두 나라 체험을 각각 한 것이다. 풍의 경우는 귀국하지 못하고 왜에서 한 세대를 내리 살았다. 풍은 왜에 체류하는 중에 딸을 낳았다. 이때가 647년이었으니, 풍의 배우자는 왜녀倭女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위와 관련해 그가 661년 환국할 때 왜녀를 왕비로 맞아들였었다. 660년 7월, 신라와 당의 합공合攻이라는 사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