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독창적 천재
“1969년 개념 미술가 더글러스 휴블러는 ‘세계는 대개 흥미로운 사물로 꽉 차 있고, 난 이 이상 추가할 생각이 없다.’고 썼다. 나는 휴블러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됐지만, ‘세계는 대개 흥미로운 글로 꽉 차 있고, 난 이 이상 추가할 생각이 없다.’고 다듬겠다. 이는 오늘날의 글쓰기가 놓인 새로운 조건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 보인다. 전례 없이 많은 유용한 글에 직면한 우리가 마주한 문제는 글을 더 쓰고 싶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는 거대한 양의 글을 뛰어넘는 방식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 엄청난 양의 정보를 뚫고 나갈 것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운영하고, 분석하고, 조직해서 배포할 것인지가 나의 글과 너의 글을 구분한다.”(13쪽
『문예 비창작: 디지털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는 「서문」의 시작부터 다른 작가의 문장을 빌리되 바꾸어 말하며 글쓰기와 관련해 이 시대의 무수한 글과 엄청난 정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이야기한다. 글을 처음부터 새롭게 쓰는 고전적인 방식을 넘어,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으로서의 창작 행위. 이러한 접근 방식은 역사적으로 탁월한 ‘비독창적 천재’들의 시도를 통해 꾸준히 있어 왔다. 인용문들을 재구성한 베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제약을 문학의 도구로 삼았던 문학 단체 울리포, 일상을 녹음한 그대로 책으로 묶은 앤디 워홀, 누구나 작품을 재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한 개념 미술가 솔 르윗…. 그리고 오늘날 어떤 글쓰기는 이러한 흐름의 극단에 가 있다.
저자가 (본인의 작업을 포함해 발견한 예시들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 전체를 매일 하루에 한 쪽씩 타자로 필사해 1년간 블로그에 올린 작업. 『뉴욕 타임스』 하루치 기사 전문을 전유해 900쪽 책으로 출판한 작업. 쇼핑몰 매장 안내도의 입점 매장 목록을 재구성한 데 불과한 목록 형식의 시. 그런가 하면 자신이 받은 모든 신용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