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정 이강래 선생은 일제시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으신 33인 중 한 분으로 한글학자이자 국어교육자이다.
이강래 선생님은 1885년에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원주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서울공대의 전신인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에 입학해 근대적 문물로서의 도자기학을 공부하다가, 1910년 나라를 잃자 만사를 제쳐두고 보재 이상설 선생을 따라 만주며 러시아를 돌면서 암중모색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내로 들어왔다.
귀국해서는 개성에서 정화여고, 송도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조선어 수업을 맡았는데 [애국창가집 사건], 3.1운동 예비모임 등으로 여러 차례 일제에 구금되며 고초를 겪다가 1920년대 중반 배화고등여학교 조선어 담당 교사로 부임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1927년부터 조선어학회 회원이 된 이래 [한글]지 창간(1932, 한글마춤법통일안(1933 작성, 조선어 순회 강연회(1934, 표준어 사정(1935, 큰사전 출간 준비(1936~ 등 조선어학회의 제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큰사전 제작 기간 동안에 조선어학회의 제7대 간사로 있으면서 이극로 등이 시작한 큰사전 제작의 뒷살림을 도맡았다. 그러다가 1938년에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두 달간 구금되고 이 일로 일제 당국의 종용으로 배화여학교 교사직을 강제 사퇴하게 되어 조선어학회 일만 전담했는데 그 기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선어학회 사건(1941이 터지면서 함흥으로 끌려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배화여중에 복직되어 교장직을 맡았고 6.25 전쟁통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경복중학교의 교감을 맡아 천막 학교의 살림을 도맡았고 그 와중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출간(1947~1957의 행정적, 실무적 일에 줄곧 참여하였다.
해방 후 최현배(연세대, 이희승(서울대, 조동탁(고려대 선생 등이 고등교육(대학교육에서의 국어국정교과서를 전담하였다면 초등교육 분야에서는 박창해(조선어학회, 김한배(창경국민학교, 유태영(동덕여자국민학교 선생 등이 이른바 [바둑이와 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