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4
1. 출생과 성장 ···················································································13
2. ‘문장’지 통해 시단에 데뷔 ···························································21
3. 일제 말기 암흑 속에서 ·································································35
4. 해방공간의 시작과 문단 활동 ······················································51
5. 민족진영의 순수시 계열에서 ························································68
6. 종군작가단으로 6.25 참전 ···························································81
7. 전후 서울에서 문학에 전념하다 ·················································103
8. 술과 멋을 아는 풍류 문인 ·························································119
9. 격조 있는 유머·위트의 대가 ····················································128
10. 자유당 말기 의미 있는 활동 ····················································136
11. 자유당 말기의 짙은 어둠 속에서 ·············································149
12. 4월혁명의 불쏘시개 노릇
먼동이 트기 직전, 어둠을 걷은 지조의 시인
이 책은 그간 문학분야에 집중되어 왔던 조지훈 선생의 일면을 조명한 글이다. 조지훈 선생은 <승무僧舞>를 비롯하여 <고풍의상>, <봉황수>, <낙화>, <바위송> 등 수 많은 절창을 쓴 시인이면서도, 한국학자이자 논객으로 활동한 복합적 지식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문인·지식인들이 친일로 훼절을 할 때 청년 조지훈은 오대산으로 들어가 청절한 지조를 지켜냈다. 또 자유당정권 말기에는 공명선거 전국위원회 중앙위원으로 반독재투쟁의 선두에 섰을 뿐 아니라, 이어지는 4.19혁명에서는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조지훈 선생은 풍류문인과 학자, 논객으로 호방하게 살다가 48세의 짧은 생애를 접었다. 민주와 공화 그리고 정의 대신 ‘법치’ 만이 나부끼는 다시 암울한 이 시대, 지성을 갉아먹는 지식인들이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권력이 부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교수·언론인이 줄을 서는 이 시대에, 그리고 추하게 빛바래지는 시인·문인들이 넘치는 시절에, 조지훈 선생과 같은 기개 있는 지식인을 기대하면서 짧지만 깊고 넓었던 삶과 사유의 족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동이 트기 직전, 어둠을 걷은 지조의 시인
조지훈 선생은 특출한 시인이고 저명한 대학교수였다. 교과서에 실려있던 <승무僧舞>를 비롯하여 <고풍의상>, <봉황수>, <낙화>, <바위송> 등 한국 시문학사에 고딕체로 기록되는 다수의 시를 짓고, 민족운동사와 국학 관련의 글을 썼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들어가 사전 편찬사업을 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수많은 문인·지식인들이 친일로 훼절을 할 때 청년 조지훈은 오대산으로 들어가 청절한 지조를 지켜냈다. 그래서 <지조론>을 쓸 수 있는 지식인이 되었다.
수없는 절창을 쓴 그는 시인만이 아니었다. 《한국민족운동사》, 《한국문화사서설》, 《한국학연구》등의 다양한 학문적 업적과 사상계편집위원, 자유당정권 말기에는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