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 경희궁을 위한 연가 … 4
1. 경희궁을 깨우다 … 11
2. 광해, 경덕궁을 창건하다 … 27
3. 인조, 경덕궁을 이궁으로 쓰다 … 41
4. 흥화문을 위한 봄빛 연가 … 59
5. 금천, 명당수가 흐르다 … 69
6. 경현당, 왕세자를 위한 공간 … 81
7.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 … 88
8. 자정전, 왕의 집무 공간 … 122
9. 흥정당과 존현각, 경연이 열리다 … 135
10. 태령전, 어진을 모시다 … 151
11. 서암, 왕기가 서린 터 … 173
12. 융복전과 회장선, 왕과 왕비의 침전 … 197
13. 경희궁의 후원 … 225
14. 훼손된 경희궁 … 243
부록
경희궁 복원 과정 … 262
경희궁 십경 … 264
조선왕조 가계도 … 266
경희궁 연표 … 268
참고문헌 … 271
1. 역사적 아이러니가 숨쉬는 궁궐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파괴되자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하고 새 궁궐을 영건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정원군(인조의 생부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이야기를 매우 싫어한 광해군은 그 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경덕궁(경희궁을 지었다. 새 궁궐 경덕궁은 광해군 9년(1617부터 짓기 시작하여 인경궁, 자수궁과 함께 광해군 12년(1620에 완공되었다. 그런데 경덕궁의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부터 궁궐을 짓기 시작한 광해군은 정작 자신이 지은 경덕궁에도 임어하지 못한 채 폐위되고 만 것이다.
자정전에서 태령전으로 넘어가는 중간 언덕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원래 왕암(王巖으로 불렸다.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로 인해 광해군이 이곳에 경덕궁을 짓게 된 것인데, 결과론적으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왕위에 올라 경덕궁을 대궐로 사용하고,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였으니 상서로운 바위가 있는 집터가 두 명의 왕을 만든 셈이 되고 만 역사적 아이러니의 현장이라 할 만하다.
2. 경희궁을 사랑한 사람들
인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차례로 소실된 상황에서 규모가 작은 경덕궁에만 10년 가까이 머물렀고, 규모가 크고 화려한 인경궁 건물을 창덕궁과 창경궁 복구에 활용하게 된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잠시 강화행궁으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경덕궁으로 돌아와서 인조 10년(1632까지 경덕궁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조선 후기 왕들은 경덕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영조는 국왕으로서 경희궁에 가장 오랜 기간 임어하였다. 1760년(영조 36부터는 치세의 거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시간을 경희궁에서 보내고 1776년 집경당에서 승하였다. 영조가 경희궁에 있었던 기간은 여러 국왕들 중 가장 긴 시간으로 무려 19년 4개월이었다. 왕세손 시절 정조는 경현당에서 조참(朝參을 하고, 평소에 신하를 만나 정치적 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