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1부 근대공원 태어나다
1. 외국에서 보고 온 이상 공간, 공원
2. 한국의 최초 공원, 각국공원
3. 민중의 첫 공원, 독립공원
4. 경성의 최초 공원, 파고다공원
2부 근대공원의 성장통
1. 조선의 흔적 지우기
2. 그들의 종교, 근대공원이 되다
3. 궁궐의 개방과 테마파크화
4. 일제가 새롭게 제시하다
3부 도시문화를 느끼다
1. 인공 자연의 대중 향유 장소
2. 공공과 상업, 소외와 집중의 장소
3. 끽다점에서 맥주를 마시다
4. 근대 교양과 아동이 등장하다
4부 공원은 나이테가 없다
1. 사라진 원형, 원형과 복원의 충돌
2. 공공장소의 이념 동상과 기억을 강요하는 기념비
3. 갈 곳 잃은 노년의 공원 이야기
나가는 글
근대와 함께 탄생한 공원
한국에서 공원은 ‘근대’와 함께 유입되었다. 첫 등장은 1888년 ‘public garden’이란 표기로 시작한다. 인천의 각국조계지 내 각 영사관이 공유한 공공 정원 개념이었다. 1897년에는 남산 아래 일본인 거류지 부근에 일본 신사를 조성하고 주변을 왜성대공원이라 불렀다. 종로 한복판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있는 공간에는 민가를 헐고 담장을 둘러서 경성 최초의 공원인 파고다공원을 조성했다. 서대문 밖에는 독립협회가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구축했으나 이때만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실제로 경험한 이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근대공원의 확장은 당대의 도시문화를 만들었다. 공원은 인공 자연을 향유하는 대중 장소였으며, 공공과 상업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하는 데이트 장소였으며, 룸펜과 노인이 머무는 소외의 공간이기도 했다. 성인은 끽다점에서 맥주를 마셨지만 한편에는 아동을 위한 공간이 들어섰다. 당시 사람들은 단어로만 존재하던 ‘공원’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했고, 또 향유했을까?
조선의 흔적 지우기, 근대공원의 성장에는 아픔이 있다
근대공원의 조성 배경에는 권력 집단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라 불리는 각국공원은 각국의 공동 요구로 공동조계지 사이에 위치했다. 그러나 조계지의 특성상 조선인의 이용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독립협회의 독립에 대한 시각적 구현체로 조성된 독립공원 또한 존치 기간이 매우 짧아서 공원의 효용 가치를 찾기 쉽지 않다. 조선 왕실에 의해 구축된 파고다공원(탑골공원 또한 조성 초기에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 일제강점기 근대공원 조성과 유지에는 조선총독부와 경성부가 있었다. 조선시대 관공서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지역에 조선의 흔적을 지우고 장충단공원, 사직단공원, 효창원공원, 훈련원공원이 조성됐다. 특히 대한제국 군인의 추모 공간이었던 장충단공원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가 들어섰고, 파고다공원에는 재정고문 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