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족 살림을 맡아 열 명의 자녀를 키운 현모양처
장계향은 조선 시대의 효녀이자 현모양처였어요.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맡아 하느라 열아홉 늦은 나이에 혼인을 했지요. 혼인한 이후에는 시댁 충효당에서 선행이라는 가풍을 이어 나가며 대식구의 살림을 맡았어요. 충효당은 넉넉한 집안이었지만 장계향은 재산을 욕심내지 않고 시댁에서 분가할 때도 남편과 상의해 재산을 두고 나왔지요. 관직에 오르지 않고 학문을 닦는 남편 이시명을 존중했고, 남편 전 부인의 아이들까지 열 명의 자녀를 바르게 키웠어요. 아들 갈암 이현일이 높은 관직에 오르며 정부인이라는 지위를 얻은 장계향은 정부인 안동 장씨로도 알려져 있어요.
재능을 감추고 살아간 문인
장계향은 아버지 장흥효에게 『소학』을 배웠어요. 평생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 온 아버지의 지혜와 겸손을 보고 배우며 또래보다 의젓하고 총명하게 자랐지요. 하지만 어린 장계향이 초서를 쓰고 시를 짓고 그림까지 그리며 비범함을 드러내자 장계향의 부모는 딸이 너무 똑똑하고 능력이 많은 것을 걱정했어요.
그래서 장계향은 때가 되자 시서화를 접고 『예기』를 읽으며 살림을 배우는 등 여자로서 덕을 쌓는 데만 집중했어요. 장계향의 작품으로는 호랑이를 생생하게 묘사한 〈맹호도〉와 〈성인음〉, 〈학발시〉, 〈경신음〉, 〈소소음〉 등 시가 있어요. 초서로 쓴 〈학발시〉는 『학발첩』으로 남아 있고, 〈성인음〉과 〈소소음〉은 남편 이시명이 글을 쓰고 며느리가 수를 놓아 『전가보첩』으로 만들어 재령 이씨 집안에 전해지고 있어요.
사람들의 끼니와 마음까지 챙긴 사회사업가
장계향의 시댁 충효당은 존경 받는 가문이었어요. 가마솥에 죽을 끓여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나누어 주었지요. 하지만 불안정한 나라 상황 때문에 배고픈 사람들이 늘어나자 장계향은 사람들을 좀 더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장계향은 음식이나 옷, 약, 잠자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할 일거리를 마련했어요. 양반 신분이었지만 자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