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장기려를 다시 쓰며 묻고 또 물었다
프롤로그/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의사
1부 어린 시절
선친과 가족
고향 평북 용천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에 저항한 개신교 사립학교
유년 시절
장기려를 있게 한 사람, 이경심
1920 년대 개성과 기독교
송도고보 시절
2부 의사 수련기
의사 되기를 결심할 당시의 의료계
진료 과목 선택 과정
“내 눈동자요 내 손과 발이었던 여자”
전문의 수련과정
이광수 소설 주인공 해프닝
스승 백인제
장기려와 노래
장기려와 스포츠
3부 평양 기홀병원 시대
이해할 수 없는 침묵
‘대전’을 등지다
무의촌 진료와 이용설 박사
평양 기홀병원
의사들의 텃세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되다
더럽혀진 교회를 등지고
사면초가가 준 값진 선물
삶과 신앙의 스승들 1 -야나이하라 다다오, 함석헌, 후지이 다케시
4부 공산 치하의 평양생활
해방 이후 북한의 보건의료
충돌하는 기독교와 공산주의
건국하다 죽어야지
보이지 않는 북한 땅의 최고 통치자
평양 산정현교회
5부 한국전쟁과 장기려
아직도 계속되는 한국전쟁
전운 (戰雲
돌아오지 못한 개: 장기려가 겪은 평양 폭격 피난
삶과 신앙의 스승들 2-오정모, 주기철, 손양원
6부 복음병원 시대
장기려의 사랑
제3육군병원
용공혐의로 체포되다
의사로서 행복했던 복음의원 시절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고
복음의원의 정체성 진통
누가 역사 바로세우기를 말하나
누가 설립자 전영창을 부정하나
복음병원 설립일은 언제이며 초대 원장은 누구인가
의학도로 알찼던 부산의대 시절
행려병자 곁으로
첫 세계 일주
장기려의 교회 실험: 성서 연구를 위한 부산모임
장기려의 글쓰기
7부 청십자 의료보험 시대
의료보험의 유래
박정희는 의료보험의 아버지인가
성경 공부도 좋지만 사회에 유익한 일을
청십자의료보험의 창립
전국청십자연합회 결성
자력으로 세운 청십자병원
법정의료보험 시대의 개막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리며 우리 곁을 살다간 장기려는 일본 신사 참배에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았고 독재자 김일성과 전두환 앞에서 소신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의사였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헌신하지만 권력과 돈 앞에 비굴하거나, 민주화 투쟁에 헌신하지만 공동체 내에서는 독재자로 군림하는 인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북한에서 장기려는 번번이 길가는 거지들을 불러 와서 겸상 차려 함께 먹었다. 그의 아내가 굶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남한에서도 지갑을 두고 나왔다고 생각해 그냥 지나쳤다가 병원에서 월급 받은 게 생각나서 되돌아가 거지에게 수표를 주었다. 그가 수표를 쓰려다 경찰에 체포되었기에 장기려의 수표 선행이 드러났다. 차남 집에 머물 때는 가정 일을 돕는 아주머니와 함께 밥상을 차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웬 차별이냐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전쟁 이후 장기려는 무료 병원을 고집했고, 부산대학교 뒤편 창고에 방치된 행려병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의료봉사를 했다. 부산 뇌전증 환자 모임인 장미회 초대 회장이 되어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매월 나가서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기려는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병자든 모두 같은 사람으로 대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룬 의사로서의 성과나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었던 사랑도 귀하지만 사람을 오로지 사람으로 대한 의사였다는 사실만큼 찬란하랴.
*이 평전이 주목한 장기려의 위기
이 평전은 장기려가 평생 맞닥뜨렸던 절체 절명의 위기 순간을 주목했다. 많은 이들이 장기려 직면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에 관심이 없다. 흘러간 옛 노래처럼 몇 가지 미담만을 반복 재생한다. 『장기려 평전』은 한국 전쟁 직전 장기려가 극도의 긴장과 불안으로 구토를 할 정도로 공산당의 감시에 위기감을 느꼈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다. 두 차례나 미 공군의 대규모 평양 공습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