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 여기에 4
서문 | 희생자들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6
프롤로그 | 인권사회로 가는 작은 마중물이 되기를 10
제1장 드러난 반쪽의 진실
에드워드 중령의 보고서 사진 18
<데일리워커> 앨런 위닝턴 기자 보도 28
한국 내 첫 보도 - 대전형무소 4천3백 명 학살사건_ 노가원 44
사건 르뽀-1950년 7월 8일 낭월동을 기억하라_ 심규상 55
우리는 골령골에서 전쟁의 진실을 보았다 62
제2장 진실을 찾아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 운동사 104
제1부
1999년~2004년 발자취 156
주요 보도 자료 166
제2부
2005년~2010년 발자취 242
주요 보도 자료 250
제3부
2011년~2015년 발자취 286
주요 보도 자료 292
제4부
2016년~2019년 발자취 372
주요 보도자료 377
제5부
2020년~2022년 발자취 402
주요 보도자료 410
제3장 유해발굴 현황 및 매장지
유해발굴 현황 및 매장지 512
대전산내민간인학살사건 가해체계 522
[부록]
대전산내사건희생자 명단 526
연구논문 | 한국전쟁기 대전의 민간인 학살과 그 성격 528
주요 판결문 562
대전 산내 골령골 관련 작품들 574
대전 산내 골령골 진상규명운동사 연대표 598
평화공원조감도 606
권사회로 가는 작은 마중물이 되기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지 73년이 흘렀다. 이중 55년간은 은폐와 왜곡의 시간이었다. 정부는 반세기가 넘게 사건 자체를 역사에서 지우려 했다. 처음엔 빨갱이로 매도하고,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인 양 당연시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는 골령골 밖으로 사실이 알려지는 걸 막았다. 경찰은 인근 마을주민들에게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면 그것이 유족일지라도 신고하라고 했다. 미국은 학살 현장의 진실이 담긴 사진과 보고 문건을 50년간 비밀문서로 분류해 비공개했다. 그러면서 대전형무소에서 비슷한 시기 있었던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만을 문제 삼았다. 골령골은 그렇게 버려졌다. 희생자 유해는 돌멩이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밭을 갈다, 농사를 짓다 유골이 쏟아져 나와도 안식처로 갈 수 없었다.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경찰도 모두 드러난 유해의 수습마저 꺼렸다. 그렇게 유해는 처참하게 쪼개지고 부서졌다.
나머지 20여 년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치열한 싸움의 시간이었다. 사실을 알리고,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유해 발굴, 더 이상의 훼손과 왜곡을 막기 위한 싸움이었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골령골 유족회가 결성됐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희생자를 위한 공식 제사를 지냈다. 특별법이 제정됐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결성돼 정부 차원의 진실 규명 작업이 시작됐다. 수백여 골령골 유가족들이 진실 규명을 신청했다. 일부분이지만 유해 발굴 작업도 벌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2010년 이후 골령골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갔다. 사유지라는 이유로 유해 매장지에서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내는 일마저 어려워졌다. 지방정부는 현장 훼손을 위한 안내판 설치마저 막았다. 대신 그 자리에 쓰레기가 쌓였다. 다행히 지난 2020년부터 골령골은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다. 민간인집단희생자의 전국 단위 추모 공원(평화공원 조성을 위한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이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수천 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