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의 사물들
병
벽
가로등
정원
체스
막대
비사물Ⅰ
비사물Ⅱ
침대
양탄자
나의 지도첩
지레
바퀴
항아리
국자와 국
발문. 몸짓, 사물, 기계 그리고 투영에 대하여 _ 플로리안 뢰처
사물을 낯설게 응시하기, 실패하기, 숨겨진 조건들이 드러나기
이 책에서 플루서는 ‘비사물’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비사물 Ⅰ〉, 〈비사물Ⅱ〉를 제외하고는 열네 편의 에세이를 모두 평범하고 단순하고 고전적인 사물들로부터 출발하여 쓴다. 서두의 첫 에세이 〈내 주위의 사물들〉에서 플루서는 자신이 그 사물들을 ‘홀대할 만하다’고 생각함을 고백한다. 그러나 플루서는 바로 그 ‘홀대할 만한 사물들’, 바로 거기서 그 사물이 지닌 철학적 의미를 길어낸다. 이를테면 ‘벽’(〈벽〉은 ‘나’와 세계를 분리함으로써 나 대 세계라는 양가적 선택지를 만드는 사물이다. 그리고 거기 달린 문이나 창문은 “이 실존적 딜레마의 해법은 아니”다. 문이나 창문을 여닫기를 결심하는 것은 인간 주체이므로, 인간은 결국 어떻게든 벽 안 혹은 밖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조건, 윤리적 양가성의 조건 아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 인간의 존재 조건이, 플루서의 관조가 사물들에게 비추는 빛 언저리에서 함께 드러난다. 또 이를테면 〈체스〉라는 에세이에서, 플루서는 사물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그것에 대한 배경지식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망각한 채 사물을 응시할 것을 독자들에게 주문하고 또 스스로 시도한다. 그 응시를 시도할수록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시도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알고 있었지만 잊었던 것을 재발견’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플루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결론짓는다. 결국 사물을 응시하기란 “나보다 먼저 저 사물을” 발견한 수천의 타자들의 목소리로 사물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듣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존재 조건은 이토록 타자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사실은 침대라는 사물에서의 활동에 빗대어 일종의 인생론을 논하는 〈침대〉의 제6절 ‘사랑’에서도 다시 한번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사물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세대의 사람이든, 비사물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세대의 사람이든, 인간이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