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자신들만의 권력을 지키고 대국을 섬기기만 하면 백성은 어떻게 되는가?
제1부 병자호란 전 인조
1. 광해군
임진왜란과 광해군 / 광해군의 술 취한 밤 / 광해군 일가의 최후
2. 이괄
1624, 이괄의 분노 / 2일 천하 / 안전하게 도망갈 곳, 남한산성
3. 조선 국왕, 인조
“그대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노라” / 돌아보건대, 너희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 / 가도를 깔고 앉은 모문룡
4. 누르하치
누르하치의 맹세 / 1616, 누르하치의 후금(後金 건국 / 강홍립, 명과 후금의 사이에서 / 영원성 패배와 누르하치의 죽음
5. 홍타이지
홍타이지의 조선 정벌 / 정묘년(1627, 다국적국 3만 조선을 침략하다 / 평안감사 윤훤 참수당하다
6. 혼군
인조는 또다시 강화도로 도망치고 /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다” / 정묘호란 최대의 승리, 용골산성전투 / 소현세자의 분조 / 정묘약조의 후폭풍 / 멸망의 길로 들어선 명나라 / 황제가 된 홍타이지 / 파국으로 치닫는 양국 관계
2부 병자호란 중 인조
1. 남한산성
병자호란, “죽여야 할 자는 죽이고, 노획할 자는 노획하라” / 최명길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다 / 섣달 열 나흗날 밤, 인조 남한산성에 도착하다 /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통
2. 갇혀 있는 왕
“나를 구하라” / 쌍령전투 : 왕을 구하려다 죽어간 군사들 / 김준룡 부대, 적장 양구리 전사시키다 / 병자호란 최대 승첩, 김화전투 /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 황제께 글월을 올립니다”
3. 강화도에서 일어난 일
강화검찰사 김경징 / 강화도 함락 / 강화도는 지휘부의 무능으로 무너졌다 /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부녀자들 / 김경징 사사당하다
4. 삼전도의 굴욕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 / 삼학사 / 김상헌, 최명길 심양으로 압송되다 / 비극! 청으로 잡혀간 피로인들
3부 병자호란 후 인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침략인가, 인조의 오판과 무능이 불러온 전쟁인가?
명청 교체기 국제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인조의 외교 정책과 병자호란
병자호란, 어떻게 볼 것인가?
인조반정은 병자호란의 원인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명나라에 은혜를 갚는다는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반정에 성공한다. 따라서 인조에게 전 정권 세력 척결과 광해군의 외교 정책 폐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 그랬을까? 인조는 떠오르는 강자 후금을. 한낱 오랑캐로 규정할 뿐이었다. 더구나 인조는 명을 부모의 나라로 떠받드는 정책으로 일관해,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이해하려고도 수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구체적인 첫 번째 사건이 정묘호란이다. 1618년 명과 후금은 사르후에서 전투를 벌인다. 조선은 강홍립을 필두로 1만 3,000의 지원군을 파견하는데, 중원 진출을 노리는 후금은 명을 치기 전에 조선을 먼저 정벌해야 할 군사적 필요성을 확신한다. 게다가 후금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조선이 불러들인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어리석은 군주 인조의 시간은 정묘호란으로 그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저자는 병자호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병자호란은 갑자기 닥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에 앞서 40여 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불과 10여 년 전에도 정묘호란을 겪었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는 각종 경제적 요구는 물론, 명나라를 치는 데 협조하라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도 인조 정권은 시종일관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행한 명나라의 은공을 갚아야 한다며 대명의리를 위해 정권의 명운을 걸다시피 했다”
정묘호란 후, 조선은 대명의리에 빠져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도,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군사력 증강 등 전쟁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10년 후 홍타이지가 즉위하고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