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종교의 인정 투쟁인가, 농민 반란인가
전봉준의 등장과 동학농민운동의 시작!
1864년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하고, 1871년 동학교도인 이필제의 난이 진압당한 뒤로도 동학은 거침없이 세를 불린다. 외세에 휘둘리는 조정과 학정을 일삼는 탐관오리로 혼란한 세상에서 동학은 백성의 비빌 언덕이 되어준 것! 하여 1890년대 초반이 되면 동학교도의 수가 최대 15만 명에 이르러, 관의 탄압이 한층 거세진다.
그러자 동학은 최제우의 사면복권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으로 대응해 몇 번의 큰 집회를 주최한다. 특히 1893년 5월, 중앙교단의 통제력이 약한 전라도에서 열린 원평취회는 무장투쟁의 조짐마저 보이는데, 그 지휘부 중 한 명이 바로 전봉준이다. 그는 본래 고부의 훈장이자 약사로 ‘논두렁 지식인’인 동시에, 동학의 비전을 현실에서 이루려는 야심가였다.
원평취회를 마치고 고부로 돌아온 전봉준은 아버지가 군수 조병갑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1894년 2월 16일 평소 조병갑의 학정에 몸살을 앓던 지역민들을 모아 관아를 습격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당시의 평범한 민란으로 그쳤을 테지만, 지방정부의 도를 넘는 진압 작전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성난 백성은 이제 어엿한 농민군이 되고, 여기에 동학의 지역 지도자들이 합세하니, 이로써 동학농민운동이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지방군과 조정에서 급파한 중앙군을 격파하고 5월 31일 전주성마저 장악하는데…. 이에 놀란 고종은 대원군이 농민군을 조종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고 판단, 6월 3일 청에 출병을 요청한다. 청은 친청 민씨 정권을 지키고자 곧 군대를 보내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일본은 음험한 미소를 흘린다.
전통의 강호 청과 조용히 힘을 기른 일본의 충돌
10여 년간 위태롭게 유지된 평화가 깨진다!
1885년 당시 힘이 부족했던 일본과 조선의 종주국 지위를 포기하기 싫었던 청은 톈진조약을 맺는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앞으로 어느 한쪽이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