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제1장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세키가하라 고찰1
고바야카와는 배신자인가? | 이에야스의 논공행상 | 고바야카와가의 진정한 수확량은? | 미숙한 군사사 관련 연구 | 세키가하라, ‘최고 포상’의 무공은 | 왜 이에야스는 히데타다군을 기다리지 않았나 | 유명한 에피소드의 근거는 어디에 | ‘천하를 제패한 자’의 탄생 | 표변한 이에야스 | 모리 데루모토의 운명
제2장 나오에조에 이에야스는 분노했는가: 세키가하라 고찰2
나오에 가네쓰구라는 무장 | ‘2인자’를 향한 히데요시의 뜨거운 시선 | 남자로서의 과업과 의리 | ‘에도江戶’는 ‘에도穢士’ | ‘더럽혀진 땅’을 살아가는 이에야스의 정신세계
제3장 천하 통일이란 무엇인가: 세키가하라 고찰3
일본은 하나가 아니다 | 항상 ‘군웅할거’ 상태 | 종말을 맞은 가네쓰구의 싸움 | 세키가하라 여담 | 마사쓰나의 ‘배령처’ | 노부나가의 ‘천하포무天下布武’와 히데요시의 ‘총무사령?無事令’ | 가모 우지사토, 이에야스, ‘수도’에서 ‘지방’으로 쫓겨난 무장들 | 또 하나의 세키가하라
제4장 간베는 참모였는가
구로다 간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 NHK는 ‘일부일처’를 좋아한다? | 간베는 천하를 욕심냈나? | 센고쿠 시대에 ‘참모’는 없었다? | ‘적중 돌파’ 시마즈 군사 1500명의 수수께끼 | 히데요시와 당주 사이에 낀 시마즈 요시히로 | ‘쓰리노부세釣り野伏’ 전술로 이룬 시마즈 최강 전설
제5장 여성주와 일본 무쌍의 용장
다치바나 소세쓰의 ‘라이키리雷切’ 전설 | ‘2만 대 700’ 격전의 끝 | 긴
양자택일: 도요토미인가, 도쿠가와인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라는 무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도요토미가의 유력한 가신이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내내 애매한 태도를 보이다가 끝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섰다. 그래서 히데아키를 배신자라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남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이미 입지가 위태로워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동군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봐야 옳다.
히데아키의 이런 배경은 곧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경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는 최강의 두 세력이었고 무장 영주들은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선택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한 영주들은 대부분 세력을 키우지 못했으며 서군을 택한 영주들은 몰살 혹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배신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렇게 영주들에게 가문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거대한 결단을 강요했다.
결단을 내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전투 하루 전에 서군의 세 요충지 중 하나인 마쓰오산성을 점거했다. 이에 따라 동군과 서군이 병력을 재배치하면서 비로소 세키가하라 전투의 밑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아키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한 나비효과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큰아들의 정예군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투를 치른 것이 그 증거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가 바꿔버린 대치 구도에서 반짝이는 승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천하 통일과 군웅할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선택이 세키가하라 전투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도쿠가와가와 우에스기 가의 신경전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이었다. ‘군신’ 우에스기 겐신으로 유명한 우에스기가는 도쿠가와가의 견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를 불렸고, 이를 문제 삼는 도쿠가와가를 우에스기가의 가신 나오에 가네쓰구가 조롱했다(나오에조 사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가를 토벌하러 오사카성을 떠났는데, 그 틈을 타 이시다 미쓰나리가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내세워 거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