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그리스인과 스키타이인
2 로마인, 켈트인, 갈리아인, 게르만인
3 백인 노예
4 아름다움의 이상으로서의 백인 노예
5 과학으로서의 백인의 아름다움이라는 이상
6 블루멘바흐가 백인을‘ 캅카스인’이라고 이름 짓다
7 제르멘 드 스탈이 가르친 독일
8 미국 초창기 백인에 대한 관찰
9 외국인의 첫 번째 대규모 유입
10 랠프 월도 에머슨의 교육
11 잉글랜드인의 특성
12 미국 백인 역사 속의 에머슨
13 ‘미국학파’ 인류학
14 미국 백인성의 두 번째 확대
15 윌리엄 리플리와 『유럽의 인종』
16 프란츠 보아스, 이의를 제기하다
17 루스벨트, 로스, 인종 자살
18 퇴화한 가족의 발견
19 퇴화한 가족에서 강제불임시술로
20 새로운 이민자들의 지능검사
21 거대한 불안
22 도가니. 실패?
23 인류사회학: 외국인 인종을 연구한 학문
24 인종학에 대한 이의 제기
25 새로운 백인종 정치
26 미국 백인성의 세 번째 확대
27 흑인민족주의와 백인 소수민족
28 미국 백인성의 네 번째 확대
옮긴이의 말
주
도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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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정치사, 과학사, 경제사, 문화사를 아우르며 역사를 종합하고 있는 논쟁의 여지 없는 걸작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백인은 자유롭고 노예는 흑인이라는 관념은 허구다
이 책의 이야기는 백인이라는 관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한다. 당연히 인종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사람들을 구분하게 하는 것은 지리, 즉 어디에 사는가뿐이었다. 백인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노예는 흑인이라는 관념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노예들은 대부분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에 노예제는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제도였다. 이민족에 정복당한 사람들은 그들의 노예가 되었고, 흑해에서 시작된 이 노예무역은 20세기에 오스만제국이 종식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바이킹은 뛰어난 노예상인이었다. 그들은 5세기에서 11세기까지 북부 유럽과 러시아를 수백 차례 습격하여 가는 곳마다 약탈하고 수천 명씩 노예를 잡아들였다. 노브고로트 같은 정착지 주변과 브리스틀과 더블린에 상설 시장이 섰다. 더블린은 11세기에 유럽 최대의 노예 시장이었다. 1300년대 중반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동부 지중해의 기독교도 십자군 왕국들이 발칸반도에서 사람들을 잡아들이면서 ‘슬라브Slav’란 낱말이 ‘노예slave’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백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와 중세로 끝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영국과 포르투갈은 부랑아, 기결수, 가난한 여성들을 아메리카로 보내 사실상 노예나 다를 바 없이 일하게 했다. 그들은 주인의 완벽한 통제 속에 언제라도 가재도구처럼 팔릴 수 있었다. “17세기의 그 시점에 브리튼인 남녀는 미국 담배 농장에서 아프리카인보다 많았다. 버지니아의 정착민 숫자가 약 1만 천 명이었던 17세기 중반에도 아프리카인은 대략 300명뿐이었다. 아프리카인,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가릴 것 없이 이들 중 계약 기간을 마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1619년에서 1622년 사이에 브리튼에서 배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