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법을 통해 인간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극단의 상황이나 예외의 사건을 보아야 본질이 드러난다. 헌법이 아무리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을 선언해도 그것을 압도하는 현실들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지점이 어디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정신장애는 바로 그 지점에 서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근대의 법들이 스스로 법을 철회하는 예외를 선언할 때마다 거기에는 정신장애가 있었다. 합리적 이성의 산물이라는 법은 정신장애 앞에서 균열되어 그 내밀한 본색을 드러낸다.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강제입원과 후견, 그리고 치료감호가 견고하게 만들어진 근대적 법체계를 균열시키고 그 본질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이다. 근대적 법체계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책임지지 않는 것에 대응하여 권리도 부여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이 책은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 책임과 권리를 회복하여 진정한 법주체로 온전히 세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닫혀진 공간에 법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법은 인간을 규율대상으로 한다. 도구가 아니라 법이라는 상징과 명령을 만들어 내는 인간, 그리고 그 법이 부여하는 의무를 통하여 다시 공동체의 질서와 생존, 그리고 사회적 품위를 유지해 나가는 인간. 그렇게 인간은 법의 촘촘한 보이지 않는 그물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법 속에서 삶의 조건들을 부여받는다. 모든 태어나는 아이들은 부모가, 그리고 부모가 없으면 다른 친족, 그마저 없으면 마을과 국가가 그 부양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한 부양의무가 민법전의 어느 한 줄에 적혀 있음을 알든 모르든 그것이 수천 년 간 이어져 온 사회적 공동체의 생존전략이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가까운 사람을 부양하라는 이 의무는 도덕적인 것이기에 앞서 법적인 것이다. 단순히 그 의무 위반이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의 금지명령도 부양의무의 간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