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제1장 고구려의 금석문
제1절 안악3호분의 묘주 문제
제2절 고구려 국내성의 무덤 출토 와전 명문
제3절 광개토태왕비의 몇 가지 문제
제4절 고구려 태왕릉의 주인공
제5절 서봉총 은합 명문
제6절 모두루총 묘지명의 작성 시기
제7절 충주고구려비의 건립연대
제8절 집안고구려비에 대하여
제9절 고구려 금석문의 인명 표기
제10절 호우총의 호우 명문
제11절 갑인명석가상 광배 명문을 새긴 시기
제2장 백제의 금석문
제1절 백제 금석문의 인명 표기
제2절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제3절 금산 금령산성 출토 문자 자료
제4절 익산 미륵사지 출토 景辰명기와
제5절 부여 궁남지 출토 315호 목간
제3장 신라 금석문과 무덤
제1절 월성해자 신1호 목간의 신검토
제2절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제작 시기
제3절 금석문 자료에 나타난 訥祗王
제4절 경주 서악동 4왕릉의 주인공 비정
제5절 고신라 금석문 자료로 본 지방관제
제6절 儀鳳四年皆土명기와의 皆土 해석
제7절 경주 신라 횡혈식석실분 기와 출토 묘주의 골품
제8절 경주 성건동 677-156번지 출토 토기 명문
책을 마무리하며
고구려와 백제의 금석문은 신라 금석문에 비해 어렵다. 신라의 금석문은 고식 이두로 되어 있는데 대해 고구려와 백제 금석문은 한문으로 되어있다. 고구려 금석문은 한국 금석문의 최고봉인 광개토태왕비가 있고, 충주고구려비, 집안고구려비도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그 글자 수가 1,775자나 된다. 아직까지 백제 금석문에서는 국가차원의 금석문이 없다. 그래서 고구려와 신라 금석문에서 모두 나오는 太王이 나오지 않아서 太王制도 실시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백제 금석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4·6변려체로 된 사택지적비이다. 삼국시대 금석문 가운데 4·6변려체로 된 유일한 예이다.
백제 금석문에서는 인명 표기 자료가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 들어와 익산 미륵사지 금속기 명문과 목간에서 그 숫자가 늘고 있다. 아직까지 직명+부명+관등명+인명으로 된 자료는 1례밖에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상조상기가 7례가 있으나 부명이 나온 예는 1가지뿐이고, 관등명이 나온 예는 단 1례도 없다. 혹자는 그 이유를 서민이 만들어 사용했다고 보기도 하나 아무래도 휴대용 소형불상을 관등을 가진 귀족의 소유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서민이 비싼 금동불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문화가 발달된 고구려에서조차 4세기 금석문이 없다. 3세기에 고구려는『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主簿, 優台, 丞, 使者, ?衣, 仙人의 관등이 있어서 앞으로의 자료 증가를 기대한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목간이 백제와 신라에서는 출토되나 고구려에서는 단 1점도 나온 바가 없다. 고구려 국가 차원의 금석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태왕비이다. 물론 357년에 작성된 안악3호분의 묵서명과 408년에 작성된 덕흥리 벽화 고분의 묘지명이 있으나 그 중요성이나 글자 수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백제 금석문은 시호제가 채택되었을 것이나, 휘호가 나오는 예가 백제창왕명사리감의 昌王, 무령왕릉 묘지명의 斯麻王 등이 있다. 이에 대비되는 자료로 집안고구려비의 明治好太聖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