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명동, 관철동, 인사동 세 시절_황명걸 9
채현국 선생님을 기리며 할머니 꼰대가 되지 않기를_고은광순 19
‘라 마르세예즈’의 밤_김보경 26
채현국 선생의 존댓말_김운성 31
풍운아 채현국_김주완 33
채현국 선생님께_김철환 38
43년 늦었던 만남, 너무 빨리 끝나다_하제 김태동 41
그때 지리산 종주 이야기_남난희 45
산타와 늙은 청년 채현국_박상희 50
건달 할배와 호빵_달묵 박영현 53
현국이 생각_백낙청 59
마달거사 채현국_복기대 63
‘한국의 큰 건달’ 채현국 선생_서승 74
채현국 선생 추억_신경림 80
자유인 채현국 선생을 기억하며_염무웅 82
6.25동란이 맺어준 나의 영원한 벗 채현국_이기흥 92
채현국 선생의 파리 시절과 헌시 두 편_이만주 96
못 생겨서 다행이었다_이용학 110
채현국을 생각한다_이종찬 113
스승의 은혜_임락경 116
채 선생님_전종덕 126
징검다리_정명숙 131
영원한 천재 맨발의 마달이_정상학 137
선생님이 떠난 지 1년_최규일 139
인사동과 나의 추억_최정인 141
허군, 내 집으로 가세_허태수 144
제2부
거리의 철인_김낙영 149
인사동 그때 그 얼굴 평론가 민병산_김승환 154
기러기 훨훨_방영웅 164
민 선생님 追想 _최혁배 166
제3부
박이엽 선생 생각-인사동에서_박구경 179
박이엽 선생님과 「씨칠리아 마부의 노래」_임계재 181
늘 앞서가던 멋쟁이 박이엽_황명걸 188
제4부
소년 뱃사공 이계익_구중관 197
노촌 이구영 선생님과 이문학회_이진영 207
알타이하우스와 조관준_이상만 221
평화를 쪼다 날아간 파랑새_배평모 224
부록
채현국·채희완 대담 241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268
에필로그 288
채현국(1935~2021년
1. 일생
일제강점기인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난 채현국 선생은 1960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중앙방송>(현 한국방송 연출로 입사했다. 하지만 5.16군사쿠데타 세력이 방송을 군사정권의 선전도구로 써먹으려고 하자 석 달 만에 그만뒀다.
이후 아버지가 운영하던 부도 직전의 탄광으로 내려갔다. 강원도 삼척군 도계의 흥국탄광을 일으켜 손꼽히는 광산업체로 키웠다. 한때 조선·화학·해운 등 24개 기업을 운영하며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2위에 오를 정도로 거부가 됐다.
그러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으로 장기독재를 시작하자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유착하지 않으려면 사업을 접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이듬해 미련없이 모든 재산을 처분해 동업하던 친구들과 광부들에게 나눠 줬다.
동시에 이전부터 해오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원을 이어나갔다. 정권에 쫓기는 이들을 숨겨주고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과 본격적으로 함께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창작과 비평>의 뒤를 봐주고 가난한 문인과 예술가들을 조건 없이 지원했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에게는 집도 사주었다.
1988년 효암고교와 개운중학교를 둔 효암학원의 이사장에 취임한 뒤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무급으로 일했다. 학교 운영에서는 재단이나 이사장이 아닌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삼았고 자율과 자발성을 앞세웠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가 결성되면서 문교부는 가입 교사를 해직하라고 지시했지만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다.
선생은 이렇듯 엄청난 거부였으나 모두 내려놓았다.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는 대신 평생 아래에 머물렀다. 험악한 시대를 살면서 격랑에 휘둘리지도 않았고 속된 욕망에 영혼을 맡기지도 않았다. 성장을 멈추면 ‘꼰대’가 되고 계속 성장하면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선생은 진정한 어른이었다.
2. 남긴 말씀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