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사 (정홍규
헌 사 (한석동
축간사 (이윤기
기념사 (이종찬
편자 서문 겸 해제 (김영범
자료편
Ⅰ. 가계와 성장기
1. 가계와 본향
2. 가천공립보통학교 수학기
3. 대구공립상업학교 수학기
4. 중국국민당 중앙정치학교 수학기
Ⅱ. 독립운동의 주요 경로와 환국
1. 조선의용대 간부
2.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및 조선민족혁명당 간부
3.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장
4. 결혼과 환국
Ⅲ. 독립운동 관계 논설과 저작
1. 『조선의용대(통신』 기고문
① 제3호(1939.2.5, 志成, <一個日本浮虜的告白>
② 제4호(1939.2.15, 志成, <活躍在戰壕裏的朝鮮義勇隊>
③ 제7기(1939.3.21, 志成, <浮虜牧本君訪問經過>
④ 제19·20기 합간(1939.8.1, 韓志成, <朝鮮靑年?樣反抗日本帝國主義(轉載>
⑤ 제24기(1939.9.11, 韓志成, <桐村定男的日記>
⑥ 제28기(1939.11.1, 志成, <「中日親善」下的鎭江>
⑦ 제29기(1939.11.5, 田矢(志成 譯, <臺灣統治者的暴虐>
⑧ 제30기(1939.12.15, 韓志成, <目前朝鮮義勇隊的動態>
⑨ 제30기(1939.12.15, 在樹 譯, <物資統制下之日本>
⑩ 제31기(1940.1.1, 志成 譯, <日寇在朝鮮的精神總動員運動>
⑪ 제31기(1940.1.1, 在樹 譯, <物資統制下之日本(續>
⑫ 제34기(1940.5.15, 韓志成, <目前環境與朝鮮義勇隊今後工作方向>
⑬ 제34기(1940.5.15, 韓志成, <朝鮮「志願兵」問題>
⑭ 7·7항전 3주년 기념 專號(1940.7.7, 韓志成, <‘七七’抗戰中産生的朝鮮義勇隊>
⑮ 제37기(1940.10.1, 韓志成, <二年來的敎訓與今後的工作>
? 제39기(1941.1.1, 志成, <對敵工作硏究綱要>
? 제40기(3주년기념 특간, 1941.10, 韓志成, <朝鮮義勇隊三年來工作的總結>
2. 대외 기고문과 강연문
① 「조선의용대의 과거와
1. 출생과 성장기(학창 시절 자료
족보와 제적부, 조모 사진과 양친의 동석 사진, 모친의 독사진
가천공립보통학교 수학기 자료
대구공립상업학교 수학기 자료
중국 망명 후 남경의 중앙정치학교 대학부를 다녔던 기록 등
2. 독립운동의 주요 경로와 환국 관련 자료
한지성은 1936년 중앙정치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그가 독립운동의 장에 첫발을 내민 것은 조선민족혁명당 내의 청년당원 비밀서클 가담이다. 이 서클은 1938년에 ‘조선청년전위동맹’이라는 명칭과 조직개요를 공개했고 그때 한지성은 6인 집행위원 중 1인이었다. 그 후로 그는 조선의용대,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조선민족혁명당, 중한문화협회, 중경 한국청년회 등의 성원, 간부, 역원 이력을 거쳐, 1943년 8월부터 만 2년간 파인(派印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장이었다.
1948년 4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행. 이후 행적 아직 밝혀지지 않음.
3. 독립운동 관계 논설과 저작 자료
한지성은 조선의용대 창설 때 본부의 정치조 요원으로 배치되었고 대내 정훈자료 및 대외 선전자료 제작을 담당했다. 중앙정치학교 수학기에 익히고 닦은 중국어문 독해와 작문 실력을 대장 김원봉이 높이 사서였을 것이다. 그 후로 한지성은 조선의용대 기관지를 위시한 여러 매체에 기고하여 자주 글이 실렸다.
환국하고 4개월이 조금 못되던 1946년 8월 말에 한지성은 서울 황금정의 태평문화출판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문헌』이라는 제목의 편역서를 단독으로 펴냈다. 책에는 대서양헌장(1941.8.14부터 얄타회담에 관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미국의회 보고(1945.12.1까지, 지난 5년간 연합국 최고지도자들이 관여했던 헌장, 선언, 공보, 담화, 연설, 보고문 등 17건이 중문과 영문에서 번역되어 실렸다. 한지성은 머리말에서 “이 책은 전세계 반(反파쇼 민주국가와 민주인민이 전승을 쟁취한 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