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1부 계몽이란 무엇인가?
뫼젠: 시민들의 계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1783
멘델스존: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1784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1784
빌란트: 계몽에 관한 여섯 가지 질문(1789
바르트: 계몽의 다양한 개념(1789
하만: 크리스티안 야코프 크라우스에게 보낸 편지(1784
제2부 사상과 언론의 자유
클라인: 사상과 출판의 자유에 대하여: 군주와 위정자와 문필가들을 위하여(1784
바르트: 언론의 자유와 그 한계: 통치자와 검열자와 작가를 위한 고려사항(1787
모저: 언론(1792
팔: 새로 도입된 언론 자유 제한조치에 대하여(1792
피히테: 유럽 군주들에게 사상의 자유를 회복할 것을 촉구함(1793
제3부 계몽과 혁명
림: 계몽은 인간 이성의 요청이다(1788
모저: 진정한 정치적 계몽과 거짓된 정치적 계몽(1792
티프트룽크: 계몽이 혁명에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1794
에르하르트: 민중의 혁명권에 대하여(1795
베르크: 계몽은 혁명에 야기하는가?(1795
옮긴이 해제
원제 및 출전
참고문헌
18세기 계몽 개념을 둘러싼 논쟁의 시작과 주요 쟁점
이 책은 칸트의 에세이를 포함해 계몽을 정의하고 또 제대로 실현하고자 치열하게 논쟁하고 고민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글 16편을 골라 엮은 것이다.
1783년부터 1798년까지 프로이센의 지식인들이 매달 첫째, 둘째 주에 회원들의 자택에서 비공개 토론모임을 가졌다. ‘계몽의 벗들’이라는 이름의 이 모임은 열두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고, 모이는 날이 수요일로 정해져 있어서 일명 ‘수요회’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베를린 월간 학보》라는 잡지를 간행했고, 이 매체는 모임의 토론 주제인 계몽에 관한 논의를 주도했다. 회원 중에는 프로이센의 재무장관, 국법을 기초한 법학자, 왕의 주치의, 출판인, 신학자, 왕립극장장, 교육부 장관 등이 있었다. ‘계몽의 벗들’과 그들의 기관지 격인 《베를린 월간 학보》는 계몽 군주를 자임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신임이 두터운 고위 관료와 학자들이 계몽에 관한 토론과 계몽사상의 전파를 선도한 구심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임과 매체의 성격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주창한 계몽 담론은 소수의 지식인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계몽’의 성격을 띤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사전에서는 “계몽”을 이렇게 정의한다. “계몽(啓蒙: 지식 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이 풀이를 보면, 한국어에서도 계몽이란 먼저 깨우친 (잘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이끌어 깨닫게 만드는 것, 역시 ‘위로부터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듯싶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칸트가 생각한 계몽 개념은 원칙적으로 ‘위로부터의 계몽’을 배제한다.
《베를린 월간 학보》에서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토론이 시작된 직접적인 계기는 전통적인 교회결혼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었다. 교회에서 치르는 혼례성사는 번잡한 허례허식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결혼은 신성하므로 교회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이를 통해 풍기문란과 도덕적 타락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똑같이 ‘계몽’의 이름으로 제기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