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농민 출신으로 수상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무사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무사신분을 얻어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조슈번(長州藩 출신이라는 점도 이토가 출세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번벌(藩閥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그가 젊은 나이에 메이지정부의 고위 관료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_6쪽
이토는 쇼카손주쿠를 통해 요시다 쇼인을 만났고 이후 평생의 스승으로 떠받들었지만, 요시다는 이토가 근대일본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_9쪽
이토가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켜가는 과정에서 그의 정치적 지향을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된 것은 천황 측근들이 일으킨 이른바 ‘천황친정’운동이었다._16쪽
이토는 유럽 입헌제도 조사를 통해 입헌제 수립의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두 선생으로부터 국가조직의 큰 틀을 이해하게 돼 체제구상의 전망을 충분히 세웠을 뿐만 아니라 영국·미국·프랑스의 자유과격론자의 저술을 금과옥조처럼 잘못 믿는 일본의 현 상황을 타개할 방도와 수단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는 전제군주에 대항해 입헌제를 쟁취한 구미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자유과격론에 이끌려 입헌제를 도입할 것이 아니라 천황제를 중심으로 기존의 여러 국가기구를 입헌적으로 바꿈으로써 입헌체제의 수립이 가능하다는 확신이었다._45~46쪽
이토는 헌법제정자의 임무를 마치자 입헌정치의 운용의 책임도 맡게 되었다.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맡은 이토는 헌법 심의과정에서 1888년 4월 새로 설치한 추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헌법 발포 후 정부 일선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제1회 의회 개설 당시 수상 야마가타의 요청으로 귀족원 의장을 맡게 되었다. 헌법제정자로서 실제 입헌정치의 정착과정에도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_84쪽
1880년대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정부의 지도자이면서 대한정책 결정의 핵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1882년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