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승리한 전쟁이다
1866년 10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인 피에르-귀스타브 로즈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군함 7척과 병력 1400명을 갖추고 우리나라 한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도에 쳐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병인양요’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조선 원정’이라는 전쟁이다. 병인양요의 결과 우리는 크게 패하여 강화도를 점령당하고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전쟁의 궤적을 살펴보면 이와는 다른 내용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조선이 프랑스의 침략을 무찔렀다고 했다. 프랑스 정부 역시 조선 침공에 실패한 ‘패전’이라고 평가했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각종 보물과 문화재를 약탈해간 것을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비판하기까지 했다.
병인양요 이후 조선은 전통적으로 왕실의 피신처였던 강화도에 포대를 세우면서 수비를 강화했다. 1871년 미국은 아시아에 안정적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조선을 타깃으로 삼았다. 6월 10일 미국은 로저스 제독과 함선 5척을 앞세워 강화도의 초지진으로 향했다. 거기서 미군은 첫 번째 장벽인 갯벌에 부딪혔다. 작전 시간은 늦춰지고 병력의 절반이 전쟁도 치르기 전에 손실되었다. 결국 미군은 광성보까지 진출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해 군을 물리고 만다. 서구 언론뿐 아니라 미국 의회도 이를 패전으로 받아들여 해군을 질타하고, 로저스 제독은 군복을 벗게 된다. 전쟁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패배한 전쟁으로만 알았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과 왜 승리한 전쟁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관계의 역학 속에서 근대사를 보다
1800년대 말 서구 열강은 동북아시아에서 완벽한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실제 1880년대의 중국은 이홍장이 이끄는 북양함대를 중심으로 아편전쟁, 청불전쟁을 겪으면서 점차 서구 열강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급부상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청나라를 이기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이면서 양면전쟁을 계획하고, 조선은 부득이 그 전쟁의 중심에 놓였다.
청나라는 이처럼 당시 동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