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열며
7장 격돌과 충격
반격과 반전
사람은 사람으로 만들고 책은 불태워라 | 이승훈의 반격과 권이강의 상소 | 다산과 이기경의 긴 악연
사형 집행과 초토신 상소
내게 이럴 수가 있는가? | 사형 윤허와 옹색한 법 적용 | 이적과 기적
진산사건의 종결
이기경의 유배와 꼬이는 관계 | 재앙이 여기서 비롯될 것이다 | 정면 돌파형과 권모술수형
정약용과 정약종
긴장성 두통 | 아버지의 상경과 셋째 형 정약종 | 신선술과 천지개벽을 믿었던 정약종
하담을 바라보며
공자의 사당에 절하지 않은 이승훈 | 홍문관 수찬 임명 소동과 대통 천거 | 갑작스러운 부고 | 망하루의 슬픈 눈길
후회하는 마음의 집
아버지께 바친 다짐 | 나는 뉘우침이 많은 사람 | 나를 지키는 집
8장 신도시의 꿈과 밀고
안동 별시와 영남 만인소
영남을 족쇄에서 풀다 | 네가 이미 알지 않느냐? | 영남 유생 1만인의 2차에 걸친 연명 상소
놀라운 화성 설계
그를 불러 성제를 올리게 하라 | 단계별 사유와 합리적인 공정 | 놀라운 조선형 기중가의 탄생
금등지서와 화성 건설
채제공의 상소와 금등지서 | 나는 후회한다 | 수원 화성 공사 시작과 다산의 탈상
채제공과의 갈등과 다산의 안목
균열과 틈새 | 고비에서 빛난 순발력 | 현륭원 식목부 정리, 엑셀의 원리를 꿰뚫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한영익의 밀고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밀고 | 주 신부를 피신시킨 다산 | 최인길의 대역 행세와 3인의 순교
9장 배교와 금정 시절
다산은 정말 천주를 버렸을까?
밀고자 한영익은 다산의 사돈 | 장작 광에 숨어든 주문모 신부 | 다산, 채제공을 협박하다
도발과 응전
권유의 상소와 박장설의 직격탄 | 이것도 상소냐? | 자네 집에서도 제사를 지내는가?
다산, 금정찰방으로 좌천되다
이가환의 해명과 성균관 유생의 맞불 상소 | 삼흉의 좌천과 유배 | 다산의 정치적 일기장
금정찰방 다산의 역할
금정역의 위치와 찰방의 역할 | 다산이 관찰사 유강과 홍주목사
1. ‘청년 다산’에 관한 놀랍도록 낯선 이야기
“청년 다산에 관한 책을 쓰면서 나는 지금까지 반쪽 다산(강진 시절의 다산만 보았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다산을 본 적이 없었어요.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내가 그동안 반 토막만 봤음을…….”
젊은 날의 다산에 대한 글을 집필하면서 정민 교수가 긴 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다산 증언첩』 등 600∼800여 쪽에 이르는 책을 출간하고, 『미쳐야 미친다』, 『삶을 바꾼 만남』, 『다산의 제자 교육법』 등 18세기 지식인 그리고 다산의 공부와 교육을 오늘의 삶과 연결해 들여다본 정민 교수의 짧은 소회는 예사롭지 않다.
다산은 1930년대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에서부터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민 교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호출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대까지는 애민정신과 실학사상가로, 2000년대 이후에는 지식경영자(편집자로서 재조명되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사유한 다산은 강진 유배기에 이뤄낸 수많은 저작과 당시 삶으로 구성된 다산이었다. 완성된 인간을 밑그림으로, 무결한 글로 다산의 윤곽을 완전하게 그려냈다. 흠결 하나 없는 인간이었다.
정말 그랬을까? 우리가 겪는 갈등과 고뇌와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시간은 없었던 것일까? 다산의 청년 시절은 벗들과의 우정과 배신, 유학과 서학 사이에서의 번민, 정조의 총애와 천주를 향한 믿음, 형님들의 죽음과 유배, 숱한 친지의 순교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절체절명의 위기마다 다산은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던 것일까?
정민 교수는 맥락이 맞지 않았던 다산의 글들을 의심하고, 행간이 건네는 말을 들었다. 다산이 직접 쓴 글과 로마교황청 문서 그리고 조선 천주교 관련 연구 기록 세 가지 사료를 ‘삶’이라는 조명으로 비추었다. 학술 영역에서 다룰 수 없었던, 그러나 한 사람 생에서 절대적이고도 중요했을 주변 사건들을 통해 다산을 생생히 되살려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