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의 은유로서 ‘생각’
사는 것은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몸’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생각은 ‘나의 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나의 생각은 내 몸의 형태를 닮아 있다. 생각은 몸에서 나온 ‘몸을 드러낸 은유’라고 해도 좋겠다. 마치 도시의 모든 건물과 문화가 그 지역의 땅을 딛고, 그 위에서 이루어지며, 그곳을 잘 드러내는 은유적인 것이라는 점과 같다.
몸에서 나온 것들[=물건, 문화/ 문명의 체계]은 그 몸을, 그 인간의 모양새를 쏙 빼닮아있다. 인간의 ‘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나[=인간]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은 여기서 출발한다. 융합의 힘, ‘융합+력’도 그렇다.
‘생각=융합’ -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눈꺼풀 같은
생각은 균형을 잡기 위해 그 자체로 복잡하게 ‘떨리며’, ‘변화, 지속하며’, ‘변형, 변모하며’ 몸의 생로병사처럼 ‘생로병사’를 거듭한다. 몸이 복잡한 생체의 정보 - 회로 융합으로 이루어지듯, 생각은 그 자체로 융합적이다.
눈꺼풀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깜빡이듯이, 몸은 복잡하지만 단순한 듯 부단히 변화하고 있다. 생각이 그렇다. 생각은 늘 어디론가 달아난다. 닭들이 먹이를 찾아 집을 나가듯이. 생각은 늘 콩밭에 가 있다. 그 콩밭도 밭 나름인데, 어떤 밭인가가 중요하다. 콩밭에 가 있는 내 생각의 ‘시간관리’ 말이다. 이왕이면 사유의 초점을 분명히 하고, 무엇을 사유할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사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생각한다. ‘무언가’란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둘 다를 가리킨다. 모양과 소리를 가진 것은 가시적인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비가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창조라는 것은 ‘보이는 것’에서 찾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찾을 수도 있다. 아니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 어딘가에 묻혀있을 새로운 것, 남다른 것, 특별한 것, 신선한 것. 우리는 그런 것들을 만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