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력은 열세지만 기습의 이점으로 성공할 줄 알았으나,
신정부 구성하고 혁신정강 발표한 개화당의 앞날은?
1880년 이후, 신사유람단, 보빙사 등의 일원이 되어 일본, 미국, 유럽 등 최첨단 문물을 접하게 된 조선의 차세대 엘리트.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꿈을 한층 더 구체화한다. 특히,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일부 젊은 엘리트가 중심이 된 개화당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권을 탈취하는 쿠데타를 계획한다. 하지만 민씨 세력은 건재하고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 청나라는 여전히 그들의 뒷배, 게다가 김옥균이 장담했던 자금도 병력도 부족한 까닭에 개화당의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날 판. 그러던 중, 청나라가 1884년에 베트남 종주권을 두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 조선에 주둔 중인 군대의 일부를 본국으로 소환한다. 이를 기회로 여긴 개화당은 일본 공사관으로부터 무력 지원을 약속받고 급히 거사를 단행한다.
1884년 12월 4일 밤, 개화당은 우정국 낙성식에 모인 권신들을 제거한 뒤, 12월 6일 신정부 내각의 명단과 함께 국가 개조를 위한 혁신정강을 발표한다. 하지만 원세개의 지휘로 조선 주둔 청군이 개입하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약속한 무력 지원을 중단하자, 고종은 개화당 세력과 손절하고 청군에 의탁한다. 고종의 변심으로 정변은 명분도 실리도 잃게 되고, 처음부터 열세였던 개화당의 병력 또한 이내 섬멸되어, 결국 개화당이 꿈꾼 세상은 그렇게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조선 개화당과 일본 공사관의 오판을 낳은,
베트남에 벌어진 프랑스와 청의 한판 대결!
1884년 5월 끝난 줄 알았던 베트남에서의 청과 프랑스 간 전쟁은 6월, 베트남과 청나라 국경 근처인 박레에서 양군이 충돌하면서 다시 점화된다. 긴장이 고조되던 중 8월 청의 신식 함대인 복건 함대가 프랑스의 극동 함대에 섬멸되자 전쟁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통킹과 대만을 확보하고자 하는 프랑스와 이를 저지하려는 청의 공방은 프랑스의 대체적인 우세 속에 이듬해까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