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의의 원천으로서의 읽기,
세부에 주목함으로써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바라보기
스피박은 인문학의 요체가 ‘욕망들의 비강제적 재배치’임을 우리에게 주지시켜 왔다. 우리의 욕망이 민족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성 차별적인 승리들보다는 계급, 인종, 젠더 평등을 향하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재배치를 위한 교육을 그는 ‘상상력 훈련’이라 부른다. 이 훈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학생과 독자가 텍스트의 세부에 주목해 텍스트 안에 흔적으로 남은 타자의 목소리를 살피게 만듦으로써. 그가 자크 데리다의 텍스트들에서 배운 ‘탈구축’deconstruction이란 해체하고 파괴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이 같은 면밀히 읽기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읽기의 근원적인 목표는 지식 습득이 아니라 정신의 습속 변화며, 비교 문학자인 스피박에게 이를 위한 최상의 무기는 여전히 문학 교육, 특히 영문학 연구 전통이다. 무언가가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음을 언제나 유념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정교하게 발전한 제도적 문학 연구를 폐기하기보다는 ‘긍정적 사보타주’를 통해 그것의 성과를 움켜쥐고 사용하라고 권한다.
이건 한가한 요청 아닌가? 세상이 불의로 가득 차 있으니 세심한 읽기보다는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직접적이고 긴급한 사안이 줄지어 있을 때 읽기에 전념하기란 거의 불가능함을 그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읽기 교육을 통한 상상력 훈련이 꾸준히 선행되지 않는다면 사회 정의를 향한 움직임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을지언정 유지될 수는 없다는 것이 스피박의 오랜 지론이다. “세부를 향한 이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혁명도 지속되거나 고양될 수 없지요”(22. 그의 말마따나 사회적 약자들 혹은 서발턴이 헤게모니의 회로에 진입했을 때 또 다른 억압자로 돌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상상력 훈련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요컨대 스피박은 장기적인 준비를 요청한다. 지식인의 재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지식인으로서 그는 이처럼 상상력을 훈련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