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에 부쳐
제1편. 경주노씨 성립과 그 일파의 선산지역 정착과정
Ⅰ. 머리말
Ⅱ. 우리나라 姓貫제도 형성과 발전
Ⅲ .경주노씨 기원과 시조를 전후한 世系 검토
Ⅳ. 조선전기 인물 배출과 선산지역 정착과정
Ⅴ. 맺음말
제2편. 조선후기 무신의 중앙 관료 생활 연구
Ⅰ. 서론
Ⅱ. 무과 급제의 과정
Ⅲ. 중앙 관료 생활
Ⅳ. 승진을 향한 노력들
Ⅴ. 결론
제3편. 정조대 영남 무관 노상추의 지역 정체성과 북방 관직활동
Ⅰ. 머리말
Ⅱ. 노상추의 가문 배경과 지역 정체성
Ⅲ. 북방에서의 현지 인식과 관직 활동
Ⅳ. 맺음말
제4편. 『노상추일기』의 신유박해 기록 검토
Ⅰ. 머리말
Ⅱ. 노상추의 천주교 인식
Ⅲ. 서울에서의 신유박해 정보 기록
Ⅳ. 내포에서의 신유박해 활동 기록
Ⅴ. 맺음말
제5편. 조선후기 盧尙樞家의 재산변동과 농업경영
Ⅰ. 머리말
Ⅱ. 노상추의 일기, 가계와 이력
Ⅲ. 노상추가의 재산변동
Ⅳ. 노상추가의 농업경영
Ⅴ. 맺음말
제6편. 19세기 초반 盧尙樞의 백운동 別業 조성과 경영
Ⅰ. 머리말
Ⅱ. 백운동(白雲洞의 농업지리적 조건
Ⅲ. 이주
Ⅳ. 경제 기반의 확대
Ⅴ. 하민들과의 관계
Ⅵ. 노상추 사후의 별업
Ⅶ. 맺음말
제7편. 노상추(1746~1829의 토지매매정보 수집과 매매활동
Ⅰ. 머리말
Ⅱ. 토지 매매명문과 매매
Ⅲ. 토지 매매정보 유통과 居間人
Ⅳ. 買賣明文 成文과 소유권 확보
Ⅴ. 맺음말
제8편. 조선후기 盧尙樞家 奴婢의 역할과 저항
Ⅰ. 머리말
Ⅱ. 노상추가 소유 노비의 변동
Ⅲ. 노상추가 노비의 역할
Ⅳ. 노상추가 노비의 저항
Ⅴ. 맺음말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조선후기 변동기의 사회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자료
노상추(1746~1829는 영조 22년 경상도 善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安康(慶州, 자는 用謙, 호는 西山窩이다. 貫鄕의 시조는 신라때 大匡政丞을 지냈다고 전해지는 盧光漢이며, 朝鮮朝에서는 入鄕祖로 알려진 盧從善으로부터 12世에 해당한다.
『盧尙樞日記』는 노상추 자신이 17세(1762 무렵부터 쓰기 시작하여 자신이 사망하는 84세(1829까지 기록한 것으로서, 그 가운데 14년 정도 분량이 失傳되고 그 나머지 53년 치의 분량은 현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개인 일기 자료로는 가장 긴 시기에 걸쳐 쓴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일기는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조선후기 변동기의 사회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시계열을 갖춘 중요한 자료이다. 최근에 와서 이 일기 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무신의 관료생활, 남녀관계, 산송과 상언·격쟁 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연구가 이루어져 주목된다.
노상추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명망 있는 士族의 위상과 풍모를 계승하여 영남 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했던 무관이었다. 그가 무관에 종사하게 된 데에는 黨禍에 휩쓸린 집안 내력과 함께 구조적인 문제가 내재하고 있었다. 노상추 집안의 사람들은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된 갑술환국(1694을 거치는 과정에서 집권 노론에게 배척을 받아 문과로 입신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영조 연간에 남인 일부가 가담한 ‘戊申亂’(1704이 진압되어 영남 지역이 ‘叛逆鄕’으로 낙인된 뒤로는 文士로 현달하는 것이 한층 곤란하게 되었다. 이렇듯 노상추가 문과를 포기하고 무관으로 진로를 결정하게 된 데에는 영남 남인에 대한 정치적·지역적인 홀대가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정조대에 무과에 급제한 노상추는 그 뒤로 30여 년간 내·외직을 오가며 생애 대부분을 관료로 복무하였다.
외직으로는 함경도 갑산, 평안도 삭주, 충청도 홍주, 경상도 가덕에서 근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