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5
1 출생과 성장기
출생과 가풍 23
아호의 변화와 의미 36
관원이 되기 위하여 성균관으로 41
「항일성토문」, 최초의 민족운동 50
2 일본 유학, 민족운동가로서의 수학기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첫발을 내딛다 61
동맹휴교, 두 번째 민족운동 70
메이지대학에 진학하다 79
민족운동을 예비한 학회 활동 89
학회 활동의 대안으로 기독교회에 입회하다 99
3 중국으로 망명, 민족운동가로서의 성장기
동제사, 직업혁명가로서 출발지 112
상하이 시절, ‘국사적 자랑’을 잃지 않고 121
구국종교의 뜻을 품고 일신교를 창도하다 1 26
「대동단결선언」, 민족운동이론가로서의 첫 선언 135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참가를 요청하다 145
4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건립, 삼균주의의 배태기
대한독립의군부, 3?1민족운동을 준비하다 153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다 160
임시정부 수립의 예비 회의, 분열에서 단결로 172
대한민국임시정부, 민주공화제 정부의 탄생 181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기초하다 187
5 유럽에서 독립외교, 사회주의자로 활동
상하이에서 파리로, 파리한국대표부에 합류하다 199
루체른 대회,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인정받다 206
노동사회개진당의 대표로 독립외교 활동을 이어 가다 211
코민테른에 가입을 신청하다 222
6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 복귀하다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234
한살임당을 재창당, 아나키즘을 표방하다 241
독립당의 이념을 제시하다 253
무정부상태의 임시정부에 복귀하다 261
7 이승만의 임시정부를 옹호, 범한독립당을 추구
국민대표회의와 임시대통령 탄핵, 이승만을 옹호하다 267
이승만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다 274
이승만의 복권을 시도하다 283
민족유일당운동이 촉발되다 290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하며 범한독립당 설립을 추진하다 299
8 당정 일체의 독립운동, 삼균주의의 정립·주창기
민족유일당운
한국민족운동의 이념을 체계화하고
임시정부를 지도한 실천적 지성
1887년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시에서 태어난 조소앙은 일찍이 대한제국 관료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에서 근대 교육과 법학을 수학했다. 그러나 1910년 국권 피탈과 함께 조소앙이 출사하여 복무할 나라는 사라지고 말았다. 충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 가풍에서 성장한 그에게 일제 식민지배에 영합하는 길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직업혁명가로 투신하여 중국 망명길에 오른 조소앙은 마침내 1919년 3?1민족운동으로 독립운동 역량이 결집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온 힘을 쏟았다.
이후 조소앙의 삶은 임시정부와 분리되지 않는다. 1920년대에 잠시 이탈한 적을 제외하고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등장한 때부터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그의 독립운동은 임시정부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조소앙은 출중한 영어 실력과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독립외교 활동을 수행하며 임시정부의 굵직한 주요 문건들을 기초하고 작성했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19,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언」(1931, 일명 「대외선언」, 「대한민국건국강령」(1941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임시정부의 유일한 여당인 한국독립당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중국 독립운동 인사들과 교류하며 대일(對日 한중동맹에 강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8?15해방을 맞아 귀국한 뒤에는 김구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민족진영 정치세력을 결속하고자 했다. 사회당을 결당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어 정치 활동을 본격화하려던 그의 계획은 그러나 6?25전쟁 중에 납북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1958년에 영면한 뒤에도 조소앙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냉전체제의 해체와 함께 재평가되어 우리 민족운동사의 중요한 일부로 연구되기 시작했고 1989년 대한민국정부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