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
제1장 계구수전제(計口受田制와 북위(北魏 균전제(均田制
Ⅰ. 머리말
Ⅱ. 독과제(督課制로서의 계구수전제
Ⅲ. 정복왕조와 독과제
Ⅳ. 계구수전제에서 균전제로의 전환
Ⅴ. 독과제와 삼장제
제2장 북위의 대민정책과 균전제
Ⅰ. 머리말
Ⅱ. 다양한[諸色] 예속민호의 출현
Ⅲ. 전토의 분화: 상전(桑田·마전(麻田·유전(楡田·조전(棗田의 출현
Ⅳ. 방할(方割과 균전제·방장제(坊墻制의 관계
Ⅴ. 동서무역·유목경제와 균전제의 기능
제3장 「목란시(木蘭詩」의 시대 ―북위 효문제 시기 대유연전쟁과 관련하여―
Ⅰ. 머리말
Ⅱ. 「목란시」의 내용과 그 쟁점
Ⅲ. 가한과 천자로서의 북위 황제
Ⅳ. 책훈십이전(策勳十二轉과 상서랑(尙書郞
Ⅴ. 북위시대 명당의 설립 경위
Ⅵ. 흑산두(黑山頭와 연산호(燕山胡
Ⅶ. 통만성(統萬城 성민(城民으로서의 목란
Ⅷ. 군제와 목란
Ⅸ. 여자의 종군
제4장 대당제국 내 번인(蕃人의 생활
Ⅰ. 머리말
Ⅱ. 번인의 인구수와 활동
1. 번인의 인구수
2. 번인의 활동 영역
Ⅲ. 번인의 법률적 대우
Ⅳ. 외국인의 활동과 호류(胡流
제5장 위진남북조시대 묘장습속(墓葬習俗의 변화와 묘지명(墓誌銘의 유행
Ⅰ. 머리말
Ⅱ. 묘장습속의 변화
1. 봉분(封墳과 배장(陪葬의 문제
2. 허장(虛葬·잠매(潛埋와 오호십육국·북조의 장속
3. 묘전(墓前 석각(石刻의 문제
Ⅲ. 묘지명의 출현과 그 유행
1. 묘비에서 묘지명으로
2. 묘지명의 변화
3. 예제와 묘지명의 유행 문제
제6장 위진남북조-수당시대 장속(葬俗·장구(葬具의 변화와 묘비·묘지명 ―특히 묘지명의 자료적 성격―
Ⅰ. 머리말
Ⅱ. 장속과 장구
1. 분묘(墳墓와 묘전(墓前 장구
2. 묘중(墓中: 壙中 장구
Ⅲ. 묘비·묘지명의 형제와 유행
1. 묘지명의 형제·문체, 그리고 규격상 등급
2. 묘비와 묘지명의 유행
Ⅳ. 묘지명
호한체제란 무엇인가?
저자는 위진남북조-수당시대를 강의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 시대의 흐름에 대한 중요한 특징을 찾고자 하였고, ‘호한체제(胡漢體制’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호한체제’란 후한 말 이후 중국 서북방 유목민족(호족이 중원 지역으로 진입한 후 그곳에 살고 있던 농경민족(한족과 대립?충돌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종국에는 공존의 길을 찾아간 기나긴 역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세계제국인 수당의 문명이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후한 말부터 시작된 중국사상 최초의 ‘민족 이동’은 중국의 역사 전개에 새 국면을 열었다고 말한다. ‘중국고전문명’이 질적인 면에서 아주 다른 차원의 유목문화와 대면하게 된 것으로, 위진남북조에서 수당에 이르는 시기는 단순히 중국적 전통왕조의 계승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 형성의 과정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이런 저자의 관점은 기존 학계의 연구 경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기존의 학계에서 견지해 온 입장, 즉 ‘흡수론(吸收論’적인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모든 문명의 원류는 화하(華夏에 근원하여 발전한 것으로 호족의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일방적 관점이라 지적하며 이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생겨난 이론이 이른바 한화론(漢化論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국내외 학계에서 저자의 견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고, 중국학계에서도 심도 깊은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호한체제의 사회적 전개 과정
호족들이 주체가 되고 한족이 참여하여 추진했던 호한통합은 정치적 행위와 제도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경제, 사회, 문화, 생활습속 등 사회 전반에까지 이르렀다. 호족정권이 중원 지역에서 실시한 제도는 외형적으로 보면 한족정권이 오랫동안 시행해 왔던 정책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특히 토지제도인 균전제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 속내를 보면 유목민들이 유목시절에 영위한 원리와 방식이 그 제도를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균전제 외에도 당시 실시된 독특한 도시구조인 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