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세월 속에서 신념을 지킨 사람들,
사육신과 생육신
우리는 흔히 생육신을 사육신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곤 합니다. 단종 복위를 주도하다가 죽임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을 사육신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 아래에서 벼슬하지 않고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원호, 남효온, 김시습, 이맹전, 조려, 성담수를 생육신이라 합니다. 이들은 대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해 살았습니다.
“여섯 벗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살아있음이 죽음만 못하네.”
신의를 지키던 집현전 학사들마저
참형을 당해 사육신이 되었으니
누가 있어 멀고 험한 유배길 동무해 줄까.
나는 비겁하고 어리석어
여섯 벗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살아 있음이 죽음만 못하네.
원호는 사육신처럼 목숨을 바쳐 임금을 섬기지 못하고 살아 있는 자신을 비겁하다고 질책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살아 있음이 죽음만 못하네’에는 그런 원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원호의 마음을 담은 시 그림책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원호는 세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로 오래 일하며 성삼문 정인지 등과 왕실의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병약했던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원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로 돌아갑니다.
“시사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조용히 물러갈 뜻을 품고 있다가 단종이 즉위한 처음에 관직을 사퇴하고 원주로 돌아왔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얼마 후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영월로 유배되자, 원호는 유배지와 가까운 사내평 언덕에 허름한 집을 짓고 단종 계신 동쪽을 향해 앉고 잠들며 어린 임금을 섬겼습니다. 손수 농사 지은 채소를 박에 담아 단종 계신 청령포로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단종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자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부모를 섬기듯 삼년상을 치렀는데, 이러한 원호의 충효 일체 사상은 생육신 중에서도 그를 돋보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