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뜻하는 단어 ‘하임’은 복수형이다.
히브리어로 삶은 단수로 존재하지 않는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더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삶에 관한 우화들
오르빌뢰르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이자 세속주의자이자 랍비인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을 “한 세계에 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에 사는 것,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세계 사이에 유대감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어쩌면 가장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죽음과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을 시도한다. 마치 해진 옷을 깁는 일처럼, 떠난 이와 남은 이들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오래된 유대의 언어와 고인의 생전 기억으로 메우고 있다.
원리주의에 희생당한 「샤를리 에브도」의 정신과 의사 엘자 카야, 그와 생전에 ‘죽음’과 ‘공포’를 주제로 서신을 교환했던 의사 마르크, 아우슈비츠에서 함께 살아남아 생의 마지막까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시몬 베유와 마르셀린 로리당, 자식에게조차 자신의 삶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끝내 침묵 속에 눈을 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라, 늘 같이 놀던 동생 이사악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어린 형, 병마에 시달리며 예전과 같은 ‘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친구 아리안과 그 끝을 예감하면서도 친구 곁을 지킨 오르빌뢰르 본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마치 유대인들이 무덤 위에 올려놓는 조약돌처럼, 우리 안에 작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죽은 이들이 변치 않는 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그 자리의 의미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책무라는 의식이다. 오르빌뢰르는 고인의 영혼을 유대의 기도문인 카디시로 위로하고, 애도자들의 슬픔과 한탄 섞인 고백을 추모의 말로 번역하는 가운데 이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 이렇게 차곡차곡 포개어진 이야기들이 죽음보다 더 긴 ‘삶’이라는 실에 매달려 깊은 유대감 속에 전달되고, 저마다의 상실의 기억이 사려 깊은 손길의 위로를